거북이의 날적이


뛰는 엄마 (위에) 날아가는 아들

정병은님

0

2234

2018.01.07 17:20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부산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비싼 KTX를 타고 가는데 당일로 되돌아오기 아쉬웠다. 모처럼 일상을 벗어나 부산의 명소를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올랐다. 문제는 지환이가 계절학교 프로그램을 위해 학교에 가야하는데, 엄마가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협조할지 여부이다. 지환이는 아침기상이 힘들어서 두들겨 꺠우다시피해야 간신히 일어나는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늦장을 부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시간이 임박해서야 서둘러 집을 나서기 때문에 지각도 자주 하는 편이다. 시간을 앞당겨 깨워놓았더니 꾸물거리는 시간만 더 늘어지더라. OTL.  


그런데 아침에 깨우고 서둘러 재촉하는 엄마가 없는데 과연 준비를 제대로 해서 학교에 늦지 않게 갈 수 있을까... 당일치기 출장은 몇번 경험이 있지만 숙박 출장은 흔하지 않은 터이다. 게다가 엄마와 달리 외할머니라면 청개구리 수준으로 말을 안듣는 수준이라 염려가 되었다. 이놈이 어릴때는(아마도 중학생때까지는) 외할머니한테 순종하고 지시를 따르는 편이었는데 성인이 되어가면서 점점 할머니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건 꼭 하고, 하라고 하는 건 안하는 식이라서 외할머니는 지환이를 버거워하였다.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 지환이에게 약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엄마가 부산에 출장가야 하는데, 네가 해야 할 일을 잘 할 것 같으면 안심하고 다녀오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출장을 포기해야 한다. 어떻게 할래? 지환이는 호기롭게 스스로 잘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한다. 엄마가 출장을 다녀와야 돈을 벌고 그래야 아들한테 용돈을 줄 수 있다나 어쩐다나... 돈맛을 아는 지환이에게 엄마의 출장기간 동안 해야 할 과업과 그에 대한 보상을 돈으로 제시하였다. 돈을 모아서 사고 싶은 물건이 있었던 지환이는 엄마가 제시한 과업과 보상에 수긍하고 그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1) 엄마의 출장 첫째날, 학교에 지각하지 않도록 서둘러 가면 오천원을 받는다. 그런데 마침 지갑에 오천원짜리가 없어서 만원을 주었다. 대신에 지각을 하지 않으면 거스름돈으로 오천원을 가져오고 지각을 하면 육천원을 가져오기로 하였다.

- 지각을 하고도 만원을 모두 써버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거짓말 여부는 쉽게 체크할 수 있으니, 일단 아들을 믿어주겠다고 전제하였다. 또한 돈을 써봐야 돈을 남길 줄도 알고 소비의 경험이 쌓여야 합리적 소비를 할 수 있으므로 일단 만원을 주었다. 사실 지환이의 소비패턴을 보면, 일단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금액과 상관없이 다 쓰는 편이다. 요즘 청년들이 '탕진잼'이라고 하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건지 10원도 남기지 않고 다 쓴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쓰려면 물건값을 계산할 테니 이것도 나름 일상생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2) 엄마의 출장 둘째날, 외할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스스로 할 일을 다하면 만원을 받는다. 외할머니를 힘들게 하거나 학교에 지각하면 거스름돈으로 오천원을 도로 가져온다. 

- 엄마가 없는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해야 할 일을 챙기는 부담감을 고려하면 지각 여부에 관계없이 만원을 주는 것이 타당한 보상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엄마의 부재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자립생활을 해야 하므로 만원의 미끼를 사용하였다. 미끼가 되려면 만원 정도는 되어야 덥석 잡을 것이다. 예상대로 지환이는 만원짜리 지폐가 외할머니 손에 맡겨지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결의를 다졌다.    

  

부산가는 기차시간을 좀 여유있게 예약하고 출장 첫째날에는 아침에 지환이를 깨우고 등교준비를 시켜서 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서둘러 가면 지각하지 않을 정도, 어슬렁어슬렁 가면 지각할 수도 있을 정도의 시간에 현관문을 나섰다. 지환이는 지각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만원을 받아갔다. 부산에서 오후에 출장갔던 일을 마치고 지인과 함께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지환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학교에 지각을 하지 않았으므로 오천원을 거슬러왔는데, 그 오천원을 뽀나스로 주면 좋겠다고 한다. 정말 지각하지 않았는지 몇번 질문을 던지고, 출장 둘째날 주는 만원에 이미 뽀나스가 포함되었다고 응수하였다. 설령 뽀나스를 주더라도 일단 오천원을 엄마한테 돌려줘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간식을 더 사먹고 싶다, 엄마가 3천원을 써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등의 핑계와 거짓말을 지어댔지만 원래 약속한대로 오천원을 가져오라고 밀어부쳤다. 아무리 말해도 엄마에게 설득이 통하지 않자 지환이는 포기의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그때까지도 지환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학교갈 시간이 다되었는데 아직도 안 일어났으면 만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환이는 정색을 하면서 서둘러 준비해서 학교에 가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급하게 끊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외할머니한테 지환이의 등교준비에 대해 물었더니 전화를 끊자마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갔다고 한다. 흠... 아침밥은 안먹었을 것 같고, 그럼 학교는??? 의문을 품고 지환이에게 물어보니 지각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몇분에 도착했는데? 

57분이요. 

그럼 지각인데? 

아니에요. 저는 교장 선생님의 애제자에요. 

그게 지각이랑 무슨 상관이야? 교장 선생님의 애제자라고 해도 정해진 시간에 늦으면 지각인 거지. 

아니네요. 수업은 10시에 시작이에요. 저는 9시 57분에 갔으니 지각 아니네요. 00이는 10시 17분에 도착했어요. 00이가 지각이에요. 

그래?    

네. 00선생님이 저 지각 아니랬어요.

그럼 지각 아니군. 만원은 어쨌니? 다 썼니?

배가 고파서 음료수 2개 사먹었어요..

콜라? 다음에는 우유나 빵을 사먹는게 어떨까?

네, 알았어요...

어제 받은 거스름돈 5천원은 어쨌니?

도로 가져왔어요. 저는 함부로 엄마돈을 쓰지 않아요.

그럼! 엄마돈을 허락없이 쓰면 안되지!


그리고 그 다음날 지환이는 엄마가 출장간 동안 잘 했으니까 상을 달라고 한다. 신촌 현대백화점 지하에서 VR 체험을 하고 싶으니 체혐료 1만원과 교통비 5천원을 달라고 한다. VR 체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듯한 요구인 것 같아서 1만5천원을 주었다. 주말에는 엄마모임에 따라가서 점심으로 돈까스를 푸짐하게 먹었다. 그리고 서점에 가더니 책을 한권 집어들고 학교에서 배우는 책이라면서 사달라고 하였다. 학교에서 배운다는 말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책을 사주었다. 그리고 혼자 신촌에 가서 3시간 동안 VR 체험을 하면서 잘 놀고 귀가하였다. ​엄마의 출장 기간 동안 평소에 하던 일을 했을 뿐인데 보상이 이렇게 많다니....아무래도 지환이가 엄마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것 같다. 






twitter facebook googl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