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의 날적이


발달장애청년의 꿈

정병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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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6 15:34

초등학생 고학년 무렵부터 지환이는 "미래에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유치원생 무렵에는 위암으로 개복수술을 받고 힘들게 투병하는 할아버지를 고쳐 주겠다고 하더니,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의사가 되서 엄마 허리 아픈 걸 고쳐주겠다"고 하였다. 허리 디스크는 나의 오랜 직업병으로, 종종 통증 때문에 쩔쩔 매며 일상생활을 잘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러더니 중학생 때 여자 친구가 교실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 나가는 걸 보고, 의사가 되고 싶은 목적이 아픈 여자 친구를 고쳐주는 것으로 바뀌었다(아이고... 이넘의 아들이란!!) 







의사가 되려면 의대에 진학해야 하고 의대는 전국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학생들이 치열한 경쟁을 거친 끝에 겨우 입학할 수 있는 곳이니, 실제로 지환이가 의사가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환이에게 "네가 무슨 의사니?", "꿈 깨!"라고 하지 않는다. 지환이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할 때, 실제로 의사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뭔가 되고 싶은 게 있다는 것, 그 되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 되고 싶다는 것이 자기만 좋은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생각해 주는 마음에서 우러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요즘에는 되고 싶은 게 없는,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비장애 청년들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는 지환이가 대견하기만 하다. 


그런데 어떤 전문가라는 사람은 지환이의 꿈이 의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에 따르면, 지환이 같은 특성을 가진 경우에는 그런 비현실적인 바램과 객관적인 현실 사이의 갭을 줄여 주어야 한단다. 그의 얼굴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자녀를 부채질 중인, 치맛바람 쎈 엄마를 응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되지도 않을 걸 꿈꾸는 발달장애자녀의 허황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엄마가 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듣고 부모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요나이의 청년 또는 청소년이 뭔가 되고 싶어하는 건 당사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건 발달장애가 있는,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청년과 청소년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그들의 기능이나 능력을 기준으로 하면 그 꿈이 터무니 없고 실현가능성이 제로이고, 그래서 황당할 지도 모르지만, 성취하기 어려워야 꿈이지 현실성이 높다면 그건 꿈이 아니라 계획이고 목표이다.


예전에 배우 주원이 '굿닥터'라는 드라마에서 자폐성장애의 일종인 서번트신드롬을 가진 의사 캐릭터(극중 이름은 박시온)를 보여주었다. 그 드라마에서 닥터 박시온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본 병원 관리자들이 박시온이 전문의로 병원에 남으려면 그의 뛰어난 진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진단의학과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닥터 박시온은 이러한 유리한 제안을 거부하면서, 설령 "잘 하지 못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꿈"이라고 말하면서 소아과에 남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바로 이 장면을 보면서 커다란 망치로 뒷통수를 쎄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또한 그 드라마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닥터 박시온의 뛰어난 능력, 의술이 아니라 정말 따뜻하고 맑은 마음이었다. 친형이 죽었을 때, 키우던 토끼가 죽었을 때, 그리고 자기가 처음으로 수술을 집도한 아이가 끝내 죽었을 때, 닥터 박시온은 가까운 곳에서 끝까지 남아서 외롭지 않도록 그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들려온 박시온의 대사들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형체가 사라진 대상(그것이 동물이건 사람이건 간에)과 어떻게 '교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고 의사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질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평할 때 그 사람의 기능이나 능력만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심성, 태도, 가치관 등도 따진다. 의사라는 직업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 전문적 기능이나 능력만을 보지 않는다. 살아있는 존재(생명)에 대한 인식, 환자를 대하는 태도, 얼굴 표정과 말투 등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왜 발달장애인에 대해서는 그토록 가혹하게 기능과 능력만 국한시키는지, 반면에 그들의 마음 따뜻함, 맑고 순수함, 진심어린 우애는 간과하는지 따져묻고 싶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되는 것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지환이의 꿈을 지지하는 건 극성맞은 엄마의 자아도취가 아니다. 바로 그러한 꿈의 존재가 지환이를 살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유명한 대안학교의 교가는 "...꿈 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게다가 누가 아는가? 백만분의 하나, 억만분의 하나, 지환이가 진짜로 의사가 될지? 비록 사회가 말하는 전문의가 되지는 못해도 타인의 상처를 닦아주고 고통을 쓰다듬어 주는 일을 할 수도 있을지?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환이의 꿈을 열렬히,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한다. 비록 남들 눈에는 터무니 없고 허황되게 보일지라도 말이다. 

정병은 / 사회학 박사 / 발달장애청년 엄마 /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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