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장애에 매몰되지 말고 상황에 집중하자

김성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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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7 18:39



국내에서는 국제 기능•장애•건강 분류로 번역되어 있는 ICF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Functioning, Disability and Health)는 국제보건기구(WHO)에서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는 장애 및 건강 상태와 관련된 기능과 활동의 분류 체계이자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기능(Functioning)’이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발달장애와 관련해서 중요한 분류 영역은 ‘활동’과 ‘참여’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체계적이고 상세한 기능과 활동의 분류체계가 필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같은 진단명에 같은 장애 등급으로 진단받은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기능과 활동의 범위, 참여 정도는 모두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세화된 기능과 활동과 참여의 요구(needs)를 개인별로 평가하고 분석하게 되면 그 프로파일에 근거하여 발달장애인 개인에게 필요한 교육, 훈련, 중재, 지원 등 다양한 서비스의 목표, 방법, 도구, 평가 방법 또는 준거가 달라질 수밖에 없고, 이 점은 ICF의 공식 문서에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좋은 체계와 틀에 비추어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발달장애인을 위한 복지와 지원 요구의 조사와 평가 방식과 체계는 매우 미흡하거나 부적합하다. 특히, 신체구조와 신체기능상에 장애가 없는 발달장애의 경우 현재 보건복지부의 조사 및 평가 방식은 실제 당사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과의 괴리가 상당히 크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사용하는 활동지원 시간을 인정받기 위한 조사문항은 대부분 장애가 발생한 부위나 그 구조적 기능에만 초점을 둔 조사 문항들이다. ‘걷기’ 또는 '하지의 기능'과 같은 표현은 ‘이동할 수 있다’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하지를 사용할 수 있고 걸을 수 있지만 이동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기능은 한 가지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몇 가지 이상이 함께 작용하며 항상 그것을 사용하는 상황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기능은 그것이 필요한 상황을 함께 표현하는 문항을 사용해 조사가 이루어져야 더 정확한 지원 서비스의 요구조사가 가능하다.


다시 설명해 보면, '시각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문장은 '(활자화된) 글을 읽을 수 있다/없다' 는 문장보다 훨씬 대상자의 기능을 좁게 정의하는 문장일 수밖에 없다. 발달장애인 대부분이 그렇듯 시력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글을 읽을 수 없는 경우까지 고려하여 분류하고 조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지원이나 도움의 요구는 그의 삶속에서 발생하는 것임에도 그것이 마치 기계의 고장난 부품을 찾아내듯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구조와 내적 기능의 결함만을 지원의 전제로 하려 한다면 그것은 삶과 분리된 서비스나 지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어떤 상황에서는 장애인과 똑같이 어떤 활동에 참여가 어렵거나 불가능해 지기도 한다. 예컨대, 흔들거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을 때 그는 장애인은 아니지만 글을 쓰거나 타이핑을 하는 기능에 장애를 겪게 된다.


한국어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러시아나 중국에서 여행을 하던 중에 함께 하던 일행과 떨어져 홀로 길을 잃어버렸다면, 그 상황에서 그는 기능에는 장애가 없지만 의사소통과 읽기/쓰기라는 활동에 참여하기 어렵고 장애인과 같은 상황에 있게 된다.




(Image from Microsoft Design)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기능은 그가 수행하거나 해야 하는 활동과 과제라는 맥락과 직결되어 있고, 이러한 맥락과 상황을 전제로 기능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실제 그의 생활과 삶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요구를 제대로 찾아내기는 어렵다. 요컨대, 기능과 활동은 그것이 사용되는 삶속의 상황과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유니버셜 디자인 또는 사용자 경험 디자인 같은 분야에서는 기능을 다양한 상황과 맥락과 연결지어 더 많은 층위의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활용가능한 환경, 제품, 도구, 콘텐츠를 설계하려는 시도를 오래 전부터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장애를 생각할 때 늘 그 장애를 가진 사람 즉 장애인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장애는 그 자체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타인들의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도 하고, 가끔은 당사자 본인도 자신이 가진 장애 자체에 매몰된 인식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한 기능(장애라고 불리우는)이 아니라 그 기능과 그것을 둘러싼 상황과 맥락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활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어렵게 하는지에 관해 관심을 두고 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요구를 살펴보아야 그 사람에게 무엇이 얼만큼 필요한지 알 수 있다.


장애가 우리에게 신체적 구조와 기능의 결함이나 부족 상태로만 인식된다면 우리는 장애인이 처한 상황을 바꾸는 일을 해내기 어렵다. 그 구조나 기능적 상태가 약물이나 수술에 의해 완치되기 전까지 우리는 그의 생활과 활동을 대신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상황을 바꿔서 기능의 장애가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모든 기능 영역에서 완벽히 장애가 없는 상태와 같은 상황을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최대한 장애를 겪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 수는 있다.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기도 하며 동시에 비장애인들도 함께 더 살기 좋은 삶의 질을 구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발달장애인의 공통적인 어려움은 감각 기능, 인지 기능, 언어 및 의사소통 기능,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 사회적으로 적절히 행동하는 기능, 상황에 맞게 판단하여 행동하는 기능 등에 있다. 이 기능 영역들에서 그 장애인이 아니라 그가 경험하는 상황을 바꿔주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평범한 일상을 돌려받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환경과 제품과 도구와 서비스를 통해 구현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복지이고 지원이고 교육이다.


장애에 매몰되지 말고 상황에 집중하여 발상을 전환하자.


- 김성남(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대표)


(이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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