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자폐? 우리는 마음을 닫은 적이 없다!

김석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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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6 11:13

​수염도 거뭇거뭇, 다리털도 숭숭하게 난 아들 녀석이 아침이면 부스스한 잠옷 차림으로 엄마와 아빠의 이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곁에 바짝 당겨 누운 아들의 볼과 뒷목 사이에서는 덩치가 커질 때마다 풍기는 냄새도 달라졌는데, 아기 때는 설탕 냄새, 소년 때는 우유 냄새, 그리고 요즘엔 마블링이 잘된 연한 살코기 냄새가 난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맡았던 바로 그 냄새다.

“아들, 엄마가 좋아?”
“좋아요.”
“음, 그럼 말야. 엄마를 꽃에 비유한다면 무슨 꽃 같아?”
“장미!”

기대도, 예상도 하지 못했던 답변에 뒤척거리던 아침잠이 단숨에 달아났다. 그리고 주변의 자폐성 장애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종종 나누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얘들도 연애감정을 느낄까요?”
“우리만 늘 짝사랑 하지. 얘들은 엄마 마음도 관심 없다 하잖아요.”

타인의 마음을 읽는 데에 어려움을 가진 자폐성 장애. 마음을 읽기 어렵다고 해서 과연 타인의 마음에 관심조차 없는 것일까? 시각장애인은 볼 수 없다고 해서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인가? 청각장애인은 들을 수 없다고 해서 대화하기를 싫어하는 것인가? 하지마비 장애인은 걷기를 싫어해서 휠체어에 앉아있는 것인가?






장미는 가을에도, 겨울에도 드물지만 피어난다. ⓒ김석주 



20년 전까지만 해도 정신과에서는 자폐인들을 ‘반응성 애착 장애’라는, 부모가 자녀를 냉정하게 방임해서 생긴 후천적 정서 장애로 진단했었다. 최근까지도 종종 오진하는 의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자폐증이 후천적 환경으로 인한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돌연변이 유전 혹은 생물학적 요인 등으로 원인이 밝혀진 후, 간혹 부모에게서 보이는 냉정함은 오히려 반응이 더디고 어려운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생긴 우울과 상실의 후속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진단 체계의 발전으로 부모에게 가중시켰던 죄책감을 내려놓게 하고 자폐인들의 발달양상과 행동특성 등에 집중하여 연구한 결과, 언어와 사회성의 어려움에 비해 각자마다 기능이나 성향의 발달 정도가 매우 다름을 발견하면서 다양한 색깔의 기질과 능력을 가진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언어영역에서 자연스런 대화는 어려우나 우수한 문법적 논리와 암기력을 가진 아스퍼거 장애나 특정한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서번트 증후군 등도 자폐 스펙트럼 선상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최근에는 자폐증을 손상의 측면이 아닌, ‘인지다양성’ 또는 ‘신경다양성’의 한 유형으로 보는 시각까지 나오고 있다. 일상적인 범주의 생활을 익히는 데에는 틀림없이 발달과정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자폐인들 나름의 독특한 패턴과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자폐’, 즉 ‘스스로 마음을 닫았다’는 명칭이 이들에게 적합한 것인지를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들이 엄마 뱃속에서부터 무슨 원한이 있어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닫기로 작정하고 태어났다는 말인가.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알기가 어려워 힘겨워하는 아이를 향하여 ‘넌 나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니, 네가 마음을 닫은 거라고 봐.’라는 단정과 외면으로 먼저 마음을 닫아버린 쪽은 우리들이 아닐까?

엄마를 ‘장미’라고 불러준 아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냥 아는 꽃 중에 아무 이름이나 답한 것일 수 있다. 또는 평소에 엄마가 장미를 자주 말하니까 외워서 답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정도 가지고는 ‘엄마는 장미 같아요.’라는 진정한 마음에 이른다 할 수 없는 것일까?

아기들이 처음 “엄마” 소리를 낼 때, 엄마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그리고 곧장 남편과 친정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한다. 그럴 때 가족과 친척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엄마들은 다 거짓말쟁이라더니, 아이구, 애가 하품하는 소리구만.”
모든 아기들은 하품에서부터, 그저 옹알거림에서부터 우연히 ‘엄마’를 소리 낸다. 그리고 엄마들은 그 우연한 순간을 포착해서 웃음과 환호와 박수와 포옹으로 의미를 붙여준다. 그제야 아기들은 자신이 낸 어떤 무의미한 소리가 의미로 살아난다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된다.

스무 살 청년이 우연히 소리 낸 ‘장미’도 엄마가 감격의 포옹으로 반응하여줄 때, 그제야 의미로 피어난다. ‘엄마’, ‘장미’, ‘포옹’, ‘좋아요’ 등 낱낱이 따로 떠돌던 소리들이 “엄마는 장미를 좋아해요.”, “엄마는 나를 안아줘요.”, “나는 장미와 엄마가 좋아요.”, “엄마는 장미 같아요.”의 의미 있는 소리들로 연결되고 서로의 마음속까지 진한 향기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들은 마음을 닫은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마음을 읽고 표현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사람들일 뿐이다. 글을 읽기 어려운 것을 ‘난독증’이라 하니, 마음을 읽기 어려운 것은 ‘난심증’이라 하면 어떨까. 아니면 청각이나 시각처럼 ‘사회적 감각 장애’라 하면 어떨까. 아무튼 잘못 붙여진 이름 때문에 이들이 받는 이중의 고통,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단정과 외면을 당하게 만드는 고통을 보아주기 바란다. 누군가 자신의 작은 몸짓들에 의미를 붙여 정확한 이름으로 불러주기만을 바라며 혼란과 두려움으로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이들을. 


(이 글은 에이블뉴스 2016-3-3 게재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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