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지원은 숨 쉬듯이

정유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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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5 17:17




글 : 정유진 (부모 / 유아특수교육 석사 / 국제행동분석가)


재현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배웠던 수영이 재주가 되어 장애인선수로 등록되었고 지역의 크고 작은 수영대회에 선수자격으로 참가합니다. 올림픽같은 큰 무대의 대표선수마냥 찰나의 순간에 순위가 뒤바뀌거나 그 순위에 연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동등한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경쟁하는 건강한 즐거움을 대회를 통해 만끽하고 있습니다. 


재현이를 비롯해서 전국의 많은 발달장애인들이 문화여가의 일환으로 체육활동을 즐기고 있고 누군가는 재능을 인정받아 선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종목의 장애인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회사에 정식으로 취직하여 훈련과 대회참여를 업무로 인정받는 직장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많은 분들의 경험과 과학적인 연구에서도 밝혀졌듯이 체육활동은 어려운 행동을 줄이고 바람직한 행동을 늘릴 수 있는 토대입니다. 다시 말해 발달장애인에게 체육활동은 특별한 재미를 주는 놀이이자 일상이고 교육과 지도의 수단이자 사회참여의 일환입니다. 


발달장애인의 삶 속에 체육활동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저 발달장애인이 체육프로그램의 이용자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또는 체육행사에 초대되거나 참가했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체육활동을 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매 순간 숨 쉬듯 지금보다 훨씬 더 미세하고 세심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전국의 발달장애 수영선수가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의 장애인수영대회가 최근에 열렸습니다. 거리별, 종목별, 대상별로 경기가 줄을 이어 진행되기 때문에 두 경기 이상 출전하는 선수들은 어쩔 수 없이 긴 시간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오전에 첫 경기, 오후 늦게 두 번째 경기를 치러야하는 일정이라면 다섯 시간 이상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데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은 지도자와 선수뿐만이 아닙니다. 발달장애인 선수를 돕기 위해 새벽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가족들도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다보니 변변한 대기 장소도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복도 바닥에 얇은 돗자리를 깔고 옹색하게 몸을 구겨 자신의 경기를 기다리는 풍경이 전쟁통 피난처를 방불케 합니다. 


언제 자신의 경기가 시작될지 모르는 막연함, 딱히 할 일 없는 무료함이 몇 시간동안 이어집니다. 우리가 흔히 발달장애인들을 지원할 때 가장 피해야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막연함에서 비롯되는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시각화된 일정을 미리 알려줄 것을 제안합니다. 아무런 일이나 지시가 주어지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상동행동에만 집중하게끔 만들거나 불필요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에 스스로 할 일을 찾도록 평상시에 훈련하고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거나 간단한 몸풀기, 선호하는 활동을 늘 준비합니다. 가정이나 학교, 센터나 복지관 프로그램 등에서 가장 권장하는 지원의 원칙과는 정반대의 일이 장애인체육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지원의 원칙에 상충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민감하게 알아챈 부모나 지도교사, 관련단체라면 어떤 지원을 해주었을까요? 장애인 선수의 컨디션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자주 바깥바람을 쐬어주고 짧은 산책을 다니며 환기시켜주었을 것입니다. 간단한 스트레칭이나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은 부스를 운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경기출전이 직장업무의 일부였다면, 다른 직업현장에 직무지도원이 있듯이 전문선수의 경기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조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기마다 장애인선수의 수발을 드느라 녹초가 된 가족들을 위한 지원도 분명 고민했을 것입니다. 


기다리다가 잠이 들어버린 부모님들 옆에서 핸드폰을 받아들고 몇 시간씩 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나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지도교사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경기를 치르고 오는 풍경 속 어디에도 발달장애인을 위한 적절한 지원은 없었습니다. 할 일 없이 기다리느라 배도 고프지 않은 선수들에게 1인1닭 간식을 지원한 관련단체가 혹여 이 지나치게 풍족한 간식으로 자신들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위한 지원은 어디에서건, 어느 때라도 그 원칙은 동일합니다. 발달장애인이 누리는 활동의 내용이 다양해질수록 그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영역 역시 새롭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혹시 빈틈은 없는지 세밀하게 잘 살펴야 하는 것은 당사자, 가족과 종사자 모두의 몫입니다. 삶의 역동이 있는 곳에 숨쉬듯 지원이 스며들 수 있도록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 이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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