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여가


어느 자폐아의 컴퓨터 적응기



경민이는 12세의 자폐아였다. 말과 글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인지능력도 기능 수준이 비교적 높은 아이였다. 물론, 보통 자폐아들이 그렇듯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자동차와 TV광고다.

자동차는 장난감 자동차가 아니라 실제 자동차를 좋아해서 길을 가다가도 처음보는 차가 있으면 꼭 여기저기 만져보며 구경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도난경보를 울리게 만든 일도 종종 있었다. 집에서는 자동차 전문잡지 수십 권을 쌓아 두고 사진과 이름 등을 즐겨 본다(읽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보는 것이었다). TV 광고 중에는 특히 정보통신이나 전자제품 관련 제품 광고와 제약회사 광고를 좋아했다.

경민이는 자폐인들이 흔히 그렇듯 기억력이 좋고, 정해진 루틴에 따라서만 활동이나 일과가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 정해진 루틴에서 변화가 생기는 것에 저항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자폐적인 특성은 컴퓨터를 사용할 때는 매우 좋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처음 컴퓨터를 교실에서 가르친 것은 CD 타이틀을 넣고 에듀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민이는 그 방법을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가 컴퓨터를 켜고, CD를 넣고, 프로그램을 찾고, 화면의 메뉴들을 눌러 활동을 시작하는 과정을 한 두 번 지켜 보고나서는 그 순서 그대로 금방 따라했다. 난 우선 몇 가지 CD 타이틀로 재밌는 활동을 해보도록 했고, 컴퓨터에 조금 익숙해진 다음에는 키보드의 자판을 이용해 글자를 입력하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래한글에서 타이핑을 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글꼴이나 문단의 편집기능을 지도하기전에 우선 자판부터 익히게 할 목적으로 동화책이나 교과서의 문장들을 입력하는 연습을 한 달 정도 하고 난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책을 보고 글자를 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이 생각나는 말이나 문장을 마음대로 쳐보라고 지시를 했었다. 시간이 좀 걸릴 과제였기에 일단 아래한글에서 타이핑을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는 컴퓨터 앞을 떠나 다른 아이들의 자리로 가서 이십분 정도 개별지도를 하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경민이가 잘 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러 컴퓨터앞으로 갔다. 그런데 경민이가 타이핑을 해 놓은 것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키보드로 글자를 입력하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 진 그 아이는 이십여 분 동안에 전자, 정보통신 관련 회사와 제약회사의 이름들로만 A4용지 두 장 분량정도를 모두 채워놓은 것이다. 게다가 아직 글자크기나 단락을 조정하는 편집기능은 배우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기본글꼴인 10포인트 크기의 신명조체로 띄어쓰기도 없이, 그렇게 빼곡이, 두 쪽을 모두 회사이름으로만 채워놓았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중복되는 회사이름도 없었다. 그 회사 이름을 한 줄에 하나씩 적어 내려가면 전화번호부 상호편의 몇 쪽은 족히 될 듯싶었다. 그 기억력과 집중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한동안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학기가 끝날 무렵 경민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컴퓨터를 배우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학동안 혼자 집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아, 인터넷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보기로 했다. 웹브라우저의 시작 페이지를 검색엔진으로 해놓고 거기에서 자신이 찾고 싶은 것을 검색창에 입력하고 검색결과를 보고 하이퍼링크를 누르면 또 다른 화면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정확히 말하면 알려준 것이 아니라 그냥 시범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경민이는 일주일도 안되서 혼자서 자신이 좋아하는 광고에 나오는 약품(예, 까스활명수, 물파스 등)의 사진을 찾아보고 있었고, 미국 자동차 회사의 70년대 자동차 모델을 찾아 그 사진을 화면에 띄어놓고 싱글거리면서 감상하기도 했다. 나는 기뻤다. 경민이에게 처음 컴퓨터를 가르쳤고 검색하는 법을 가르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찾아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비록 중요한 정보도 아니었고, 공부에 필요한 것은 아닐 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는 있게 된 것이다.

혼자서는 취미활동조차 하기 어려워서 늘 방과후에 수영장이며 태권도장이며 어머니가 데리고 다녀야 했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취미활동이라고는 TV를 보는 것 정도가 전부였던 아이였기에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되기 까지 나는 별로 한 것이 없었다. 대부분 설명을 이해하기 보다는 내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고 기억해서 한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지도할 때조차도, 검색창에 원하는 단어를 입력하는 것 이외에, 원하는 것에까지 어떻게 찾아가야하는지를, 이미지 검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해준 적이 없었다.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한 이후의 모든 과정은 경민이 혼자 알아내었고, 한 번 찾은 사이트나 이미지는 거기까지 어떤 경로나 링크로 갔었는지를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쉽게 다시 그 사진 혹은 사진이 있는 사이트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후에 거기까지 가는 경로를 더 짧게 단축시켜주는 즐겨찾기 기능을 사용하는 방법을 추가로 가르쳐 주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경민이는 나의 말로 하는 설명을 이해하고 그 방법을 익힌 것이 아니라 한 두 번의 시범을 눈으로 보고 기억해서 배운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그가 자폐아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름방학에 끝나고 다음 학기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나는 경민이 어머님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여름방학 내내 경민이가 다른 비장애 아이들처럼 하루에 서너 시간씩 집앞의 PC방에 혼자 가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 오곤 하면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취미생활을 했었다고 말씀하시며, 내 덕분에 어머님이 오랜만에 방학 때 여유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비록 온라인 게임이나 영화감상같은 걸 인터넷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민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인터넷속에서 찾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취미활동을 인터넷로 하고 있었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는데 내가 일조를 한 것 같아 나 또한 기뻤다.

이제 경민이한테는 컴퓨터와 인터넷은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교사와 부모가 늘 곁에서 지켜봐 주면서 함께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간을 통해 조금씩 습득해 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늘 같은 경로(루틴이라고도 부르는)를 통해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자폐인의 전형적인 특징과 매우 잘 맞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좀 더 많은 자폐아동과 자폐 성인들이 컴퓨터를 통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도록 돕기 위한 방안들에 대한 연구와 콘텐츠 개발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성남/ 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대표, (주)쌤스토리 대표이사

* 이 글은 <함께 웃는 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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