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가족을 전문가로 세우기 위하여

정유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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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6 06:36



가족을 전문가로 세우기 위하여


발달장애가족의 지원을 이야기할 때 가족임파워먼트 (family empowerment)라는 개념을 많이 논합니다. 가족이 스스로 자원을 이용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뜻하며 장애가족의 양육스트레스 감소와 긍정적인 대처행동을 증진시킨다는 사전적 의미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좀더 쉽게 풀어보면, 장애가족이 그 삶의 주체로 올곧게 설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다양한 서비스로 지원하고 장애가족이 치열한 삶을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장애가족을 발달장애 영역의 또다른 전문가로 인정하고 협력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가족복지 영역에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안하고 있지만 사실 이 많은 사업의 주체는 결국 복지영역의 전문가이고 실상 장애가족은 그 서비스의 수혜를 받는 수동적 입장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발달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영역에 대해 이제 막 이론과 원리를 접한 대학생, 즉 미래의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성을 성장시켜줄 중요한 주체로서 발달장애가족을 멘토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장애가족지원 프로그램을 계획, 운영, 평가해야 한다는 경직된 업무의 틀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대학생들이 책에서 말하는 장애가족의 모습을 실제로 접하며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 “가족으로부터 배우는 (learn from families)” 가족멘토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 프로그램을 경험하게 된 것은 미국의 대학교 특수교육학과의 ‘가족협력’ 학과목을 들을 때였습니다. 이 과목을 듣는 30여명의 학생들이 각각 장애가족과 일대일로 멘토:멘티 매칭을 해서 한 학기동안 장애가족의 삶을 생생하게 배우게 됩니다. 


장애가족은 모두 인근지역에 거주하는 가족들이고 미래의 전문가가 될 특수교육전공 대학생들의 멘토로 기꺼이 응해준 분들입니다. 저 역시 학생멘티로도 수업을 들었으며 가족멘토가 되어 장애가족으로서의 경험을 나누어주었습니다. 


2시간동안 진행되는 ‘가족협력’ 강의시간에는 교수가 50%의 이론강의를 진행하고 장애가족단체의 회장이 나머지 50%의 강의를 진행합니다. 학생멘티가 제출한 최종과제에 대한 평가 역시 가족멘토가 50%의 점수를 평가합니다. 가족협력과 가족임파워먼트의 이념을 공유하는 배움의 현장에 장애가족을 기꺼이 전문가로 활용해야 한다는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학생멘티가 각 가족멘토를 만나 해야할 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 총 8시간을 최소 4회에 나누어 가족멘토를 만날 것

가족멘토의 일상생활 (식사, 장보기, 운동, 놀이터, 영화관람 등)에 참여할 것

장애아동의 일상생활 (학교, 교사회의, 방과후 등)에 참여할 것

보고서 (학생이 미래의 전문가로서 가족멘토로부터 배운 점은 무엇인가) 작성할 것

가족멘토에게 감사편지 작성할 것


학생멘티가 가족멘토와 함께 체험해야할 항목은 그들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여가를 보내고 가장 중요한 장애아동의 생활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제가 학생멘티로 참여했을 때에는 정서불안이 심한 꼬맹이의 가족을 멘토로 만나게 되었는데, 어린이집에서는 여러 지원과 교육적 기법으로 하루하루를 제법 잘 보냈던 아이가 할머니 집에만 가면 자지러지게 울고 떼를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능숙하고 천연덕스럽게 대처하는 할머니도 만나게 되었지요. 가족멘토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이 가족이 매일 이 자잘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제가 가족멘토로 참여할 때에는 미국인 학생멘티에게 매콤한 제육볶음을 요리해 함께 식사했더랬습니다. 아들의 IEP회의에도 학생멘티를 초대했는데 장애가족 당사자나 담당교사가 아니고서는 참석하기 어려운 자리여서 더더욱 가족멘토 프로그램이 좋은 경험을 제공한 셈이 되었습니다.


장애가족의 삶을 밖에서 보기에는 언제나 장애아동에게 헌신하고 긴장하며 매일을 살아갈 것 같지만 실제로 가정방문을 해보면 누구나의 삶과 마찬가지로 느슨하고 조금 지저분하고 예측없이 루틴도 깨며 그저그렇게 살아갑니다. 


아니면 정반대로 매일이 지독하게 힘겹고 한시도 마음놓을 수 없으며 살림살이가 제자리에 놓여있기 어렵고 맞고 때리거나 말다툼하거나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어려운 삶을 살아갑니다.


가족멘토 프로그램은 그, 별다를 것 없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어려운 장애가족의 삶 속에 초대받는 시간입니다. 전해 듣거나 글로 읽어 익히 아는 것이었다고 해도 실제로 장애가족의 삶을 짧게나마 함께 겪어본 학생이 만들어갈 전문가의 표상은, 그런 경험이 없는 학생이 갖게 될 전문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를테지요.


가족멘토 프로그램에서는 별도의, 대단한, 따로 시간내어 고안한 서비스를 가족에게 대령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것은 장애가족에 대한 존경입니다. 자신들의 개성있는 삶을 씩씩하게 살아내고 있는 장애가족을, 또다른 전문가의 태도를 가지고 만날 것을 당부합니다.


● 가족멘토를 만날 때에는 늘 사려깊고 민감하게 그들의 일정을 고려하세요.

● 가족멘토를 존경하며, 그들을 존경하는 것만큼 전문가로서의 자기자신을 존중하세요.

● 언제 어디서나 가족멘토의 사생활보호에 유의하세요.

● 가족멘토의 다양한 삶의 단면을 체험하세요.

● 실수와 오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현명하고 용기있게 해결하세요.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즐기는 것입니다. 가족멘토 프로그램을 즐겁게 수행하세요.

 

장애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가족을 불러와야 한다는 딱딱한 사고에 사로잡힌 프로그램이나 전문가들을 경험할 때마다 장애가족의 일상에 뚜벅뚜벅 들어가도록 배려한 이 가족멘토 프로그램이 늘 그리웠습니다.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것도 아니며 한쪽을 떠받들어주는 것도 아닌, 가족과 전문가가 동등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대등하게 협력하는 생각이 열매맺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가족멘토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정유진 : 부모 / 유아특수교육 석사 / 행동분석가 / 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교육위원


* 이 글은 <함께 웃는 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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