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상윤씨의 이야기 : 네번째

김성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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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3 18:29



평생 내가 밥을 차려줘야 할지도 모른다 싶었던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밥상을 차리기까지 지나온 행보를 연작으로 펼치는 이야기입니다.


(3) 중학교까지는 그래도 행복했지


 중학교에 입학한 후 보름에 한 번 정도 학교의 급식실 한 귀퉁이를 빌려 특수학급에서 ‘요리실습’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들은 안전 문제 때문에 무척 걱정을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아이들이 흥미를 보였다. 학급의 아이들 중에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학생도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상윤이는 요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먹기만 해서 집안일을 그렇게 잘 하는 줄 선생님들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하셨다. 게다가 리코더 레슨을 받느라 일주일에 한 번은 오전 수업 두 시간만 하고 하교 하니, 그저 예술 하는 ‘철없는 왕자’정도로 여겼다고 하셨다. 한참 지나 우연히 ‘장애 학생 양육 사례발표’에 쓰는 프레젠테이션에서 상윤이가 집안일을 하는 사진들을 보시고 너무 놀라시며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하다 하셨다. 


아이의 앞날을 생각해 볼 때 요리는 자립에 있어 매우 큰 부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야채 다듬는 일을 시키고 함께 재래시장과 수퍼마켓에 다니며 물건을 사고 정리하는 일을 가르치며 연습했다. 그렇게 자잘한 준비를 해온 것이 고등학교 입학 후 요리학원에 다니게 되자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리학원에 다니면 요리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막상 아들과 내가 2009년 6월부터 요리학원에 다니게 되면서 겪어보니 학원에서 배우는 부분은 거의 중간 이상  단계일 뿐, 모든 기초적인 기술은 집에서 차근차근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밥하기 한 가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과정이 들어있는지 펼쳐 생각해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우선 우리 집 부엌을 배경 삼아 매번 가는 슈퍼마켓에서 쌀 사는 일부터 시작해 몇 인분 밥을 할 것인가에 따라 쌀 씻고, 불리고, 밥솥에 물높이를 잡아 안쳐서, 취사 시간을 맞추어 밥솥 사용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씩 차근차근 쌓아갔다. 요리사가 되기 전에 ‘보조(시다)’ 혹은 ‘조수’ 기간을 거치며 기본기를 다지듯이 불을 쓰고, 칼질을 배우며 부엌 정리와 설거지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야 한다. 특히 ‘요리 전 손 씻기’ 등 위생에 관련한 항목들도 가르쳐야 하고 반드시 앞치마를 입게 하며 복장 점검부터 했다.


상윤이를 키우는 동안 ‘기초 튼튼’과 ‘될 때까지 반복’이 두 가지 대 원칙이었다. 참 오래 걸리지만 기초를 단단히 다져 한 가지 일에 익숙하게 되면 다른 일도 그 기초를 바탕으로 점점 더 쉽게 익히게 되었다. 내가 언어를 전공한 사람이라 ‘한 가지 언어에 능숙하게 되면 제2, 제3의 언어는 훨씬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하시던 지도 교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모든 배움의 길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한길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장애를 가진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은 이래저래 ‘사리공장’이 되게 마련이라 싶다. 우리의 인내가 영롱한 사리가 되어 아이들 앞길을 인도하는 끈이 되리라 믿는다.


(4) 고등학교, 그리고 학교 밖으로


 상윤이가 드디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가까운 고등학교 두 군데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다가 초대형의 사립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진학하며 새 학교와 교육과정에 대한 긴장과 공포는 조금씩 덜어졌다. 하지만 그 또한 중대한 착각이란 사실을 입학하자마자 깨닫게 되었다. 아드레날린 섞인 땀 냄새를 뿜어내는 말만한 아이들 열세 명을 교실 하나에 집어넣으니 숨이 막힐 정도였다. ‘통합’은 이제 강 건너 불구경이 되었고 원적학급의 대기에는 오로지 ‘대입’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성인도 아이도 아닌 남자 고등학생들에게 나오는 묘한 기운은 해맑고 어린 영혼을 가진 ‘특수교육 대상자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낯설고 거리가 멀었다. 나쁜 예감은 결코 비껴가는 일이 없었고, 우려한 대로 문제가 넝쿨째 굴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설레고 긴장하는 것은 장애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인가 싶었다. 상윤이는 입학하는 날부터 여섯 시만 되면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 혼자서 준비를 다 하고 등교를 서둘렀다. 한눈에도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보여서 얼마나 대견스러웠던지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들이 얼마나 긴장하고 불안했던 지를 미처 파악하지 못 했던 미안함과 어미의 미련함에 대한 후회에 압도될 정도이다. 그러나 삼월 한 달간 통합학급에서 적응기간을 마치고 특수학급의 수업과 병행을 하면서 아이에게 예전과 다른 긴장감과 짜증이 늘기 시작했다. 


원체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이야기는 절대 않는 성격이라 특수학급의 친구들에게 몰래 묻기도 하며 아이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관찰하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가 유난히 흥분을 한 것처럼 보였다. 횡설수설하는 상윤이의 머리카락 끝을 보니 불에 그을린 듯 군데군데 오그라들어 있었다. 아이를 달래며 물어보자 급우들이 점심시간에 복도 한구석에서 빙 둘러서서 라이터로 머리카락을 슬쩍 그을렸다고 했다.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겨놓고 학교에 연락을 해서 학급아이들에게 확인해 보니 그동안 상윤이에게 해왔던 ‘장난질’의 전모가 드러났다.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서 시키는 대로 급우에게 뽀뽀를 하고, 춤추고, 트로트를 부르며 급기야 바지를 내리고 속옷까지 보여줬다고 더듬거리며 말하면서 우는 상윤이를 앞에 두고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심정 같았으면 경찰에 수사의뢰라도 해서 처벌을 하고 싶었지만, 이후에 특수학급에 돌아올 차가운 시선과 불이익을 생각해서 가해자들은 훈계를 하고 일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장애 인식교육’을 두 시간 시키는 것으로 학교 측과 합의를 했다. 아마 이 고등학교에서 일학년 전 학급 장애 인식교육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사건 후 상윤이는 그간의 충격이 되살아나는지 통합학급에 가기를 무척 두려워했고 특수학급에만 있기를 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고등학교 특수학급은 과밀한데다 커리큘럼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학교만 믿고 있을 수가 없다고 느껴왔던 차, 그 사건은 학교에 대해 더 이상의 희망을 버리고 과감히 거리로 나서기로 결심을 했던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5) 차라리 잘 된 일이었던 지도 몰라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나는 유월을 기다려 왔다. 그즈음이면 학교생활에도 적응되었을 테고, 집 안팎으로 행사 많은 오월도 지나고, 한숨 돌리며 본격적으로 '요리 배우기'에 나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 수업과 병행하며 평화롭게 성인기로 전환할 길을 찾고 싶었지, 공포와 불안에서 원적학급을 등진 채 특수학급에만 머물며 학교 밖으로 나가서 길을 찾아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성인기로의 전환, 직업 훈련, 그리고 자립생활에 필요한 기술 중에서 공통분모이며 상윤이가 배우고 싶어 하는 기술을 찾아보니 1 순위가 요리였다. 아들에게 요리를 가르치기 위해 첫째: 학교에서 조퇴나 결석이 아닌, 수업으로 인정을 받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둘째: 아이를 받아줄 수 있는 교육기관을 찾아야 했으며, 셋째: 국가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아들의 의사였다. 아들에게 일주일에 이틀 정도 학교에 가는 대신 요리를 배우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좋다’고 말을 하긴 하지만, 학교를 왜 빠지는지, 왜 요리를 배워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 눈치여서 수십 번 설명을 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먹는 일에 매우 열심을 보였던 아이였지만, 해산물에 대한 편식이 심해서 본인이 먹지도 않고 거의 공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해산물을 손질하고 요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요리사가 되려면 해물요리는 기본인데, 해산물을 먹지도 않는 네가 만지고 조리할 수 있니?‘ 라는 나의 말에 ‘할 수 있어요. 꼭 할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아들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돌이켜 보니 학교와 선생님들의 미온적 대응과 무책임함, 그리고 학생들의 그악스러움에 정이 떨어져 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내가 더 컸던 것 같다. 그때부터 학교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학교 밖에서 본격적 길 찾기를 시작한 것이 2010년 미국행까지 이어졌다.     


정규수업시간을 빼고 요리학원에서 수업을 받기 위해서, 재원증명서를 제출하면 수업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외부의 경제적인  지원을 한 푼도 받지 못 하고 순전한 자비로 학원에 등록을 한 후 학교에 전화를 하니 간단히 해결되었고, 원적 학급 담임 선생님께도 역시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특수학급 학생 하나 오든지 말든지 하나 답답하지 않은 것이 학교였다. 어차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어우러지는 통합사회를 지향하는 시점에서 학교에 소속이 되어있을 때만이라도 통합학급의 선생님들과 급우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원반에는 소속만 되어있었을 뿐, 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결코 동급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졸업식을 마치고 원반에서 졸업장을 받을 때도 누구 하나 축하를 하거나 아는 척하지 않는 무늬만의 ‘통합’이었다. 특수교육 대상인 중 고등학생들의 70% 정도가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 배치되어 있지만 따로 커리큘럼도 없는 상태로 철저히 대학입시 위주인 고등학교에서까지 물리적 통합을 하는 일은 장애학생이나 비 장애학생 양측에 다 피해가 가는 일이라고 본다. 


-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 남영/부모/한국자폐인사랑협회 운영위원/발달장애지원 전문가 포럼

 

※ 위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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