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어느 강연에서 다룬 “좋은 부모 되기”

정유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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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4 02:17





얼마 전 한 지역 협회의 집중 부모교육프로그램에 첫날 강의 강사로 초대되어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부모교육은 대부분 전문강사가 자신의 전공분야 주제에 맞추어 초대되고, 90분이나 120분씩 강의를 맡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번 강의는 첫날 하루 6시간 교육의 전체 강의를 맡았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한 사람이 꼬박 진행하는 강의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어떤 이유로 이런 강의를 준비하는지, 과연 이런 힘든 일정에 오실 분들이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 협회는 중앙에서 지원을 받아서 발달장애 가족휴식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여러 차례 가족여행이 있을 예정인데, 부모교육을 수료하신 분들을 중심으로 우선 여행인원을 선발한다더군요. 협회의 설명으로는 지역의 부모님들께서 많이 지쳐 계시기 때문에, 참여에 적극성이 부족하고 개별적으로 도움 드리기가 막막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교육 참여를 의무조항으로 넣어서라도 많은 분들을 초대하여 정보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를 굳이 강사로 부른 이유는 장애자녀를 둔 부모로서 공감할 경험을 나누는 일과 전문가로서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 두 가지 면을 다 충족해달라는 요구였겠지요. 잘 되면 좋겠지만 반대로 자신이 겪는 장애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얘기하거나 전문가 포스 뽐내며 우쭐거리다간 정말 엉터리 교육이 되고 말기 때문에 매우 긴장되었습니다. 


대규모 강의를 한 차례 진행하는 일이 한 가족을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에너지 소모가 많고 변수 조절도 어렵습니다. 각 자녀의 연령, 장애 정도, 가족의 삶의 모습이 각기 다른 상태에서 그저 내 경험지식을 바탕으로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플로어에서의 질문의 크기와 깊이, 이해 정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질문을 깊게 다루기도 어렵고, 반대로 질문들을 모두 다루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달강의 식으로만 진행하는 것도 어쩐지 서운하고 미안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이런 류의 강의는 매우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강의 의뢰를 받고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역사회 주민이라는 연대감과 6시간이라는 시간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모르지만 그분들은 지금까지 얼굴을 보았거나 앞으로 계속 볼 분들이고, 6시간을 이어 말하는 중에 제 이야기에 공감하고 소망 하나라도 얻어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강의주제는 늘 다루던 “생의 주기-부모/가족의 역할-미래설계” 라는 내용을 이어 붙였습니다. 


나와 이웃 사례를 중심으로 ‘장애부모, 장애가족의 삶’의 흐름을 보여드려야겠다, 그 생의 주기 속에 나도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 보이면, 자녀 성장에서 자녀의 장애 유형과 기능 수준에 맞추어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포기할지 합리적인 선택법을 알려드릴 수 있겠다, 아니면 그 ‘희망고문’의 날을 어찌 지내왔는지 서로 말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가족이 서로 지쳐서 밀어내지 않고 위로할 수 있도록 공감하는 의사소통방법을 알려드려야겠다, 이 길고 고된 길에 지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수용하고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후회와 번민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자신에게 말 걸고 멈추어 휴식하는 연습을 함께 해봐야겠다, 지역과 국가에게 발달장애를 책임지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는 당당함을 갖추도록 도와드려야겠다... 점점 해야 할 목록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습니다. 


당일,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넓은 강의실엔 저보다 먼저 도착한 많은 분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주셨습니다. 많은 준비들은 그 얼굴들을 대하고 다 지워져버렸습니다. 어느 과거의 내 얼굴과 지금의 얼굴, 그리고 미래의 얼굴들... 휴식지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끌려나온 심드렁한 표정들이 말없는 원성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깊게 숨을 몰아쉬고 마음을 질끈 동여매고서 ‘발상 전환하기’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원한데서 자녀 돌보는 일 없이 좋은 공부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몇 분이 끄덕이고 웃어주셔서 마음이 풀렸습니다. 


강의의 주된 주제는 ‘부모되기, 부모역할’이었습니다. 건강한 가족이라면 부모 역할은 자녀들이 안전하게, 자기만큼 성장하여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입니다. 장애자녀가 있는 경우라고 해서 다른 가정의 부모역할과 매우 다른 역할이 새로 부가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의 장애는 때로 부모노릇에서 굉장한 시련과 실패감을 주고, 다른 자녀의 부모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할 정도로 에너지를 빼앗습니다. 


각 부모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부모’가 되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원가족의 삶의 기억, 자신의 기질, 남편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등 많은 요소들이 힘을 주기도 하고 힘을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만난 장애부모들은 자신의 부모노릇이 충분하지 못했다며 자책하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6시간 안에 그 어두운 얼굴이 풀리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원칙 몇 가지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줄 수 있다면, 한번 노력 해볼만한 일이 아닙니까?



□ 부모는 이미 부모이지(부모임, Being), 어떤 조건이나 기준을 달성해야 부모가 되는 것(부모됨, Doing)이 아닙니다. 

□ 부모역할은 각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기질과 성격, 연령, 현재의 환경을 고려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미 훌륭하게 부모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부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마음을 맞추어 자녀들을 ‘함께’ 돌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친 완벽주의도, 불안도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손상시킵니다. 어떤 부모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강의 내내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앞으로도 갈길이 멀고 험하겠지만 각자 어떻게 준비해갈지 조금씩 계획을 세워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눈물을 훔쳐내시는 분들을 뵈며, 이분들이 과거의 어려움을 털어내고 있구나, 미래의 짐을 내려놓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너무나 영광이고 좋았습니다. 


경험을 나누며 마지막으로 부모교육을 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부탁을 드립니다. 앞으로 장애자녀를 둔 부모님들을 만나시면 너무 이것저것 걱정거리를 정보라고 많이 주시거나 할 일들만 가득 짐 지우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모들은 이미 많은 수고로움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저 얼마나 수고가 많으냐, 앞으로는 그 짐을 같이 나누어지겠다고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 우리 부모님들, 우리 가족을 잘 부탁합니다. 



이경아/장애부모/교육학박사/청소년상담사


*이글은 <함께 웃는 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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