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아름다운 협력으로 기억되는 미국의 특수교육 체험기

정유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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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22:37



 


아름다운 협력으로 기억되는 미국의 특수교육 체험기


나와 우리가족은 2004년 봄부터 2010년 여름까지를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우리 가족의 나이로 치면 장애를 가진 큰아이가 이제 막 우리나라의 유치원에 들어가려던 순간부터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온전히 마친 시기까지입니다. 


미국에서 유아특수교육 공부를 마치고 2010년 귀국한 이후의 저의 삶은, 이 미국생활 동안의 좋았던 경험과 가치를 우리나라에도 구현하고자 노력했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6년 넘는 시간동안 미국에서 체험했던 특수교육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협력으로 기억될 미국의 특수교육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00. 출발 (Departure)


2004년 3월 미국으로 가기 전부터 미국생활의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소 2년 이상을 살아야 할 동네가 정해진 뒤 한국에서 주5일을 치료받던 아들이 미국에서 다닐 곳을 인터넷으로 먼저 검색해보다가 주소지 기준으로 배정받는 공립 통합어린이집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구글에서 그 어린이집 교장의 이메일을 검색해서 메일을 띄웠습니다. “우리 아들이 장애가 있어 너희들이 스페셜하게 돌봐줘야 하는데 할 수 있겠니?” 라는 취지의 메일을 띄우니 하루도 걸리지 않아 답메일이 왔습니다. 할 수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며 장애아동의 상황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치료에 대해 정보를 상세히 알려주면 최대한 준비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장애가 있어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단 한마디로 하지 않고 그 어린이집을 보내기 위한 조건만을 상세히 설명해준, 얼굴도 모르는 미국 시골마을의 교장선생님만 믿고 우리 가족은 언제 돌아올지 모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01. 협력 (Collaboration)


아들의 일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감동받은 점은 바로 협력의 마인드, 즉 함께 할 때 더 아름답고 강력하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장애학생의 교육과 관련한 모든 내용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최대한 자주 논의되었고, 그 자리에서 부모는 언제나 갑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아들이 속한 학군에서, IEP를 가진 학생 (특수교육 대상자)의 경우 학교에 관련교사들이 주1회 협력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필수였고 이 회의에 부모를 초청하는 것이 권고사항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선생님들은 저를 당연히 초대하였고 저는 기꺼이 응했습니다. 아들의 학교와 가정생활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는 그 회의는 “Collaboration Meeting”으로 불렸고 미국에 머무르던 6년동안 방학을 제외하고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유난히 친구들을 때리던 시기의 미팅은 심각했었고 아들이 학교생활에 무난히 적응하던 시기의 미팅은 부드러웠습니다. 담임교사와 한국어가 가능했던 보조교사, 아들사례의 주담당자였던 특수교사, 언어치료사와 엄마였던 저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였고 때로는 교장선생님도 와주셨습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을 공유했습니다.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매주의 그 회의를 통해 인간적으로 친해졌고 그것은 친분을 넘어서는 신뢰였고 중요한 일이 닥쳤을 때 협력이라는 막강한 파워를 가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02. 조정 (Coordination)


미국의 특수교육을 체험하는 동안 coordination 이라는 단어는 “Transition Coordinator”라는 단어로 더 익숙하게 다가왔습니다. 즉 진학과 관련해서 거의 무차별에 가까운 정보를 잘 정리해서 각 아동과 가족에게 적재적소에 배분해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조정”이 필요한 이유는,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돈되지 않은 이유는 한 기관에서 다른 기관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특수교육이라는 정책적 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흔하게 벌어지는 때가 바로 진학입니다.


졸업을 앞둔 유치원에서는 잘 가시라고만 하고, 입학을 앞둔 초등학교에서는 일단 오면 알려드리겠다고만 한다면, 그 사이에서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장애아동 부모님들이 우왕좌왕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도와주는 역할이 바로 진학상담사, Transition Coordinator입니다.


장애가 있으면서 비영어권이었던 우리가족을 위해 유치원 졸업 전부터 부모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여러 초등학교를 미리 견학시켜주고 진학 후에도 담임과 만나 아이를 살뜰히 챙기며 특히 입학 초반에는 서로 낯설어하는 교사와 가족을 위해 윤활유 역할을 하며 협력의 씨앗을 심고 키워준 사람이었습니다.


스펙으로 치자면 그 동네에서 모든 이의 존경을 받던 최고경력을 자랑하던 교장선생님 출신으로 교육과 관련해서 ‘궁금하거나 답답해서 누르면 바로 솔루션이 나오는’ 최고인맥을 자랑하던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세분화된 시스템을 최고의 덕으로 치는 미국사회에서 각 체계를 넘나드는 이와 같은 포지션을 남겨두었다는 것은 그만큼 장애아동과 가족에게 전환  (Transition) 이 얼마나 두렵고 낯선 것이며 다른 이의 지원이 필요한 힘든 일인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03. 힘실어주기 (Empowerment)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저는 장애학생의 엄마라서, 게다가 영어도 잘 못하는 외국인이라서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의 이런 두겹세겹의 특수한 상황때문에 미국의 전문가와 특수교육과 학생들에게 소중하고 독특한 경험을 주는 원천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제가 다녔던 특수교육과에는 ‘부모협력 (Family Collaboration)’이라는 필수과목이 있었습니다. 장애부모와의 협력에 대한 관점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과목인데 이 대학에서는 매우 특별한 과제가 있었습니다. 이 학과와 지역내 장애부모단체가 협력하여, 미래의 전문가가 될 특수교육전공 학생에게 장애부모가 직접 처절한 현실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자원한 장애부모와 대학생을 일대일로 매칭하여 장애가족의 삶을 함께 체험하는 과제인데  “어서와~ 장애가족의 삶은 처음이지??”의 컨셉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학생의 자격으로도 학점을 이수하였고, 장애부모로도 2회 이상 자원하여 미국의 특수교육전공 학생들에게 외국인 장애가족이 겪는 고충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이 과목과 과제는 철저하게 장애가족을 최고의 전문가로 모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교과서나 강의실에서만은 절대 배울 수 없는 장애가족의 생생하고도 처절한 현실을 체험하는 시간이었고, 이 어려움을 일상처럼 겪는 장애가족이야말로 전문가가 평생토록 지원하고 존경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정신무장의 시간이었습니다.


04. 도착 (Arrival)


미국에서 장애아를 키우고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동안 무엇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제 대답은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습니다. 협력과 조정과 힘실어주기를 배웠습니다. 그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제 스스로가 누구보다 딴딴한 짱돌같은 전문가가 되었다고 자부하며, 부모로서도 희망과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제가 눈을 감는 시점은, 장애를 가진 아들보다 하루 더,가 아니라 이 소중한 가치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 제대로 구현되는 때여야 한다는 것을 지금도 되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 정유진 : 부모 / 유아특수교육 석사 / 행동분석가 / 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교육위원


* 이 글은 <함께 웃는 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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