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부모가 서로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

이경아님

0

3348

2017.09.22 22:49



어떤 자살 앞에서

 

얼마 전 장애부모들의 인터넷 까페에 인천 살던 어린 엄마 한 사람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아이의 치료비로 사채까지 쓰다가 빚과 남편과의 불화를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간 후 처지를 비관해 충동적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올해 장애엄마의 자살 소식이 벌써 세 번째이다. 올 초에 들었을 땐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니 이것도 경험이라고 훈습이 된 것인지 이번엔 좀 빨리(?) 견딜 만해졌다. 그 대신 엉뚱하게도 윤흥길씨의 중편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책 이름이 떠올랐다. 그러게 말이다, 성인 아들을 정신병원에 보내고 자책감에 자살을 선택했다는 엄마, 아이가 대소변을 못 가리자 울화로 아이를 창밖으로 던지고 자신도 몸을 던졌다는 엄마, 그리고 치료비를 견디다 못해 비관 자살한 엄마까지. 이 사람들은 한동안 “장애엄마”라는 이름으로만 내게 기억되겠구나......

 

아빠, 엄마로만 존재하는 사람들

 

이번 호에서 특집주제를 장애 아이를 둔 아빠, 엄마의 부부관계로 잡았다고 해서 참 반갑고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 기사 의도에서 밝힌 것처럼, 어떤 하나의 표현에는 그 대상을 중심으로 한 관계가 함의되어 있다. 우리가 장애아동 ‘부모’라는 표현을 우리 스스로에 대해 많이 사용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어느새 (장애가 있는) 자녀-아빠, 자녀-엄마의 관계만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게 되고, 또 외부의 시선도 그것을 당연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역시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승기만을 바라보고 있는지, 나의 ‘또 다른’ 아이 수연이와 남편,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소홀한지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가. 내가 바라던 모습과는 다른, 전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살아야 하는 깊은 상실과 상심의 상처는 오랫동안 세상의 중심을 내 아이로 만들고, 모든 것을 다 뒷전으로 밀려 나게 하였던 것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

 

한 개인이 아빠, 엄마로만 존재하는 일은 자신과 자녀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당연히 해로운 일이다. 아이와 부모사이의 건강한 거리두기를 방해하며 부부사이의 유대와 스스로의 존재감을 약화한다. 상담은 이러한 ‘애착’을 넘어선 ‘집착’이 각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이해하고 상담자와의 건강한 관계를 재경험 하여 반복되는 맴돌이를 벗어나며 자신의 세계를 건강하게 재구성하고 회복하도록 돕는 과정이다.

내담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와 모양으로 상담자를 찾지만 장애부모들의 문제는 일반적인 상담들에 비해 좀 더 많이 심각하고 깊은 상심, 좌절, 죄책감,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상담자를 압도하여 버텨주기 어렵고 고단한 경우가 많다. 내가 자신과 똑같이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는 점은 다른 부모님들이 나를 상담자로 선택하고 마음의 문을 쉽게 열게 하는 강점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전의 나의 경험들도 포함되는 ‘상처’들을 만나는 작업이라는 부담을 가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도움 되고, 동일한 상처를 지닌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써의 힘이 그들을 위로하는 것을 보며 나도 새 힘을 얻는다.

 

모든 일의 이유가 되는, 내 아이의 장애

 

내가 장애부모들의 상담에서 좀 더 힘을 쏟는 부분은 아이의 장애를 ‘직면하기’와 부모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를 '명료화‘하고 ‘문제의 소유 밝히기’이다. 부모들은 어떤 해결책을 기대하고 상담자를 찾지만 사실 상담자는 그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무언지 충분히 들어주고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해결책을 함께 찾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장애부모들은 자신들이 부딪힌 ‘벽’이나 ‘걸림돌’을 늘 아이와 연결시키는 특성이 있다.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 문제도 아이의 장애 탓인가요? 그런가요?” 그러한 질문은 부모를 무척 당황하게 한다. 아마 다른 상담자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면 서운해 하며 상심하거나 더 이상 그를 신뢰하지 않았으리라. 역시 남들은 아무도 내 속을 몰라주고, 나는 이 아픔을 혼자서 버텨야 한다는 인지도식이 다시 올라올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나를 같은 편이라 생각하시는 부모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정말 자신이 아이를 핑계거리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곤 하신다. 그것이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책을 찾는 첫 걸음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김승희님의 수필 중에, 작은 수술을 하나 받고 난 이후 까먹는 버릇이라든지, 몸이 고단한 것이라든지, 혹은 일을 미루게 되는 이전에 없던 모든 실수와 게으름들을 그 수술과 연관시키는 나쁜 습관에 대해 써둔 재미있는 글이 있다. 많은 부모님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이 ‘장애부모’라는 점 빼고는 모든 점에서 문제를 가진 부부나 개인 내담자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아이의 장애는 당장 해결되기 어렵지만 온통 아이의 장애를 모든 문제의 이유 삼는 ‘나쁜 습관’은 벗어날 수 있다.

 

서로 싸울 시간도 없는 장애부모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한 사회복지사 한 분이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복지관에서 조기교실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하나 계획해보았단다. 토요일 오후에 복지관에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아이들 양육으로 지치신 부모님들끼리 데이트라도 하시도록 시간을 내드리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거의 모든 부모님들끼리 다투고 돌아오셔서, 왜 모처럼 생긴 좋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셨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 그분들 좋은 시간 보내셨네요. 보통 때 싸울 시간도 없었잖아요.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해주시면 내년이나 후년쯤엔 즐겁게 놀다 오실걸요?”

그렇다. 보통 때 장애부모들은 싸울 시간도 없다. 엄마는 엄마대로 종일 아이를 데리고 치료실을 돌아다니고 다른 아이 돌보고 살림 챙겨야 하고, 남편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안 꼴은 엉망이고 아내는 굳은 얼굴로 아이들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으니 서로 할 말도 없고, 말할 기운도 없다. 그러니 기껏 잘해보라고 멍석 깔아주는 자리에서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이며 말들이 쏟아져 나와 싸움이 되는 것이다.

 

내편? 남편! 결혼은 현실이다

 

상담자들이 부부상담 오는 부부들에게서 많이 듣게 되는 호소는 “저 사람이 저럴 줄 몰랐어요.”라는 말이다. 나는 냉정한 상담자라서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기 보다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일을 선택하곤 한다. “아마 남편도(아내도) 그렇게 말씀하실 걸요?”

한동안 유행한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남자와 여자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잘 보여준다. 결혼생활의 유지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은 결혼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며 상대방이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란다면 나 먼저 그의 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가까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 서로 다른 외계(?)에서 온 사람들끼리 몸과 마음을 합하여 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기적이 아닌가?. 완벽히 합일되어 사는 행복하게 사는 부부가 있을까? 그것은 하나의 지향점일 뿐 정상적인 부부들은 서로 매일 적당히 포기하고 속아주며 그렇게 산다. 처음 3년은 이성애(異性愛)로, 그 다음 10년은 전우애(戰友愛)로, 나머지 남은 기간은 인류애(人類愛)로 버티면서 말이다.

 

전장속에 핀 꽃;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전장 속에 핀 꽃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모든 폭력과 허망함속에서도 존재의 생명성을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장애부모들이 세상을 바로 바라보는 맑고 푸른 눈을 다른 이들보다 쉽게 가지게 되는 이유는, 일상 속에 쉽게 간과하기 쉬운 삶의 진실들을 매일 직면하며 인간의 작고 약함을 인정하며 살아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의 장애는 부부에게는 정말 고단한 전투들을 함께 넘겨가야 하는 무거운 숙명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장속에 핀 꽃”을 경험하게 하는 특별한 선물이 되는 것이다.

아이 때문에, 혹은 아이의 삶에 집중하느라 부부관계가 소원해지거나 삐거덕거리는 부부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은 몸이 굳어있고 서로의 시선을 외면한다. 나는 그들에게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본다. 남편은 머뭇거리며 아내의 고단함이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대단할 때가 있다고 한다. 아내는 자신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지 못하는 남편에게 속상해하면서도 자신 역시 제대로 아내 역할을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하며 말없이 눈물을 닦아낸다. 어느새 그들의 말과 표정은 부드러워져 있다. 나는 그들에게 서로 바라보라고 하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도록 권한다. 그들은 서로 약간 떨며 머뭇거리고 어깨를 안아주고는 한참 말을 잊지 못한다. 그동안 그들을 괴롭혔을 외로움과 상처가 단지 서로의 말 한마디와 체온으로 녹여질 수 있다. 왜 그것을 자주 경험하지 못하는가?

 

부모가 서로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

 

우리 아이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성인으로써 살아가는 일은, 아주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어쩌면 불가능한 목표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사후에 홀로 남겨질 자녀의 미래를 생각하며 걱정하고 자신이 부모 역할을 제대로 못하여 아이의 성장을 돕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어떠한 조건과 기능,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라도 모두 존엄하며 존중받아야 하며,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서 아이들이 경험하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어질 때 가능하다.

부모는 아이들을 감싸는 일차적 환경이다. 부모의 웃는 얼굴, 서로 존중하는 모습,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행복하다. 그것이 아이의 장애로 인해 어렵다고? 돕지 않는 남편, 아내 때문에 힘들다고? 과연 그러한가? 만약 그러하다고 생각하고 계속 불평하고 불행해한다면 아이는 자신이 부모를 불행하게 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며 위축되고 불편해할 것이다. 부모가 자신의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아이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일 년째 두 자녀의 장애문제를 견디는 한 엄마를 상담하고 있다. 마치 책이라도 보고 말하듯 아이 엄마는 아이의 장애에 대한 상실감, 남편과 시댁, 친정에 대한 서운함을 돌아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한 좌절감을 말하였고 하나 하나의 문제를 용기내어 풀어가고 있다. 남편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일, 무엇보다 같은 편이라는 걸 믿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이번 추석 즈음에, 그 엄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이젠 숨 쉬기가 좀 쉬워요.” 그 집에 가면, 이제는 아이들과 남편 모두 얼굴이 밝다. 그 집의 공기 자체가 모두 부드럽고 따스해진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보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계간지 함께 웃는 날에 기고했던 칼럼입니다.  

    

이경아 (자폐자녀를 둔 부모/특수교육학 박사/청소년상담사)​

twitter facebook googl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