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와 행동


어려운 행동의 원인, 없는 걸까? 너무 많은 걸까?

정유진님

0

1392

2022.08.02 16:40




<어려운 행동의 원인, 없는 걸까? 너무 많은 걸까?>



글 : 정유진 (부모 / 유아특수교육 석사 / 국제행동분석가)



작년부터 큰 파도를 이루고 올해 더 큰 해일이 되어 재현씨와 우리 가족을 덮쳐왔던 어려운 행동, 어려운 상황은 이제 잔잔한 물결이 되어 잦아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물어온다. 그 때의 재현씨는 왜 그렇게 힘들었냐고.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재현씨는 ‘아무 일도 없는데’ 폭발적으로 화를 내거나 가족을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아무 것도 없는데’ 어려운 행동이 나타났다고 해서 원인이 아예 없는 것일까? 아니면 원인이 너무나 다양해서 한두 가지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힘든 것일까? 


어려운 행동 관련한 강의나 컨설팅을 진행하다보면 전자의 관점으로 행동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원인이나 배경을 선명하게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려운 행동이 그저 ‘아무 것도 없는데’ 나타나는 것 같다는 하소연을 많이 듣는다. 행동이 나타나기까지 원인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즉 어려운 행동에 주목한다. 


어려운 행동에만 주목하게 되면, 걱정거리는 당연히 어려운 행동으로 인한 피해에만 치중하게 된다. 더 나아가 피해 결과가 곧 애초의 의도였던 것처럼 취급된다. 재현씨의 경우, 화가 나 있음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집 안 유리창을 주먹으로 쿵쿵 때리는 행동을 자주 해왔다. 그 단계에서 당사자 재현씨와 가족간의 갈등이 더 증폭하게 되면 유리를 더 세게 내리쳤고 그 결과로 유리창이 깨지는 사고도 몇 번 있었다. 행동의 결과로 유리창이 깨졌고, 유리창을 깨뜨릴 정도의 강도로 주먹질을 한 것은 맞지만 ‘유리창을 깨려고’ 행동을 했던 건 아니었다. 


어려운 행동이 가져온 피해만 주목하는 편향된 시각은 어려운 행동의 관찰과 기록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현장의 지원자가 기록한 ABC(선행사건-행동-후속결과) 서술기록지를 살펴보면 배경이나 선행사건을 기록하는 칸은 거의 비워져 있고 행동의 형태와 피해를 중심으로 기술한 후속결과만 빼곡하게 채워진 경우도 꽤 많다. 현장의 지원자가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어려운 행동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어려운 행동의 촉발요인이나 기능을 살펴보지 않으면(못하면) 이 모든 고충의 원인은 발달장애인 당사자인 것처럼 여겨지고 행동이 벌어지는 앞뒤 맥락을 고려할 것도 없이 그저 행동을 막는 데 급급하고, 결국에는 활동의 의미있는 시도 자체를 차단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한 마디로 ‘저 발달장애인이 가만히 있어야 아무 사고가 안 터진다’는 것이다. 


어려운 행동이 나타나는 원인은 전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매우 다양하다고 가정하는 게 맞다.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아서 한두 가지로 특정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많은 원인이 매 순간 각기 다른 지분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인데도 어제는 별 일 없었다가 오늘은 큰 난리가 벌어지는 것이다. 


재현씨의 어려운 행동에 대해 의논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가족, 특수교육 전문가, 정신과 전문의, 행동분석전문가, 사회복지사, 발달장애인 부모 선후배 등에게 재현씨 상황을 이야기하고 여러 조언을 들었다. 다 달랐지만 다 맞는 것 같았다. 각기 추측하는 원인이 모든 어려운 행동을 설명해주진 못했지만 일부의 모습은 해석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 전문가가 진단해준 원인을 모두 품고 가기로 했다. 아이돌그룹 멤버가 여러 명인 것처럼 어려운 행동의 원인도 여러 개다. 노래 한 곡에도 파트마다 보컬과 댄스의 센터가 달라지듯 어려운 행동의 주된 원인도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재현씨의 어려운 행동을 대하는 것 역시 달라졌다. 행동의 원인을 알 수 없어 좌절하고 답답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재현씨가 보여주는 표정이나 말투, 작은 움직임이나 컨디션, 동작 등 모든 것이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자고 있는 재현씨를 깨울 때 붓기 상태나 피부결, 천천히 인사를 건넬 때 재현씨의 반응, 슬쩍 심부름을 시킬 때 재현씨가 기꺼이 따르는지 거부하는지 등을 세밀하게 살폈다. 이 중요한 지표를 미세하게 관찰하기 위해 일상생활과 가족의 스케줄을 전면 조정해야 했던 노력은 이전 글에 적어놓았다.


어려운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나 배경이 있고 때로는 그 원인이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가정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읊는 풍월이 아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어려운 행동이 나타났다’는 말이 곧 아무 원인이 없다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행동의 원인과 기능을 밝히려는 데 주력하지 않고 행동만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과거 50여 년 전 새마을운동이 한창인 시절의 행동수정 접근이다. 선행하는 일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이 존재하며, 그걸 밝혀내기 위해서는 더더욱 조심스럽고 세밀한 관찰과 진단이 필요하다. 



twitter facebook googl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