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와 행동


작은 변화도 감지해야 한다

정유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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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5 09:23




작은 변화도 감지해야 한다


글 : 정유진 (부모 / 유아특수교육 석사 / 국제행동분석가)



발달장애 청년 재현씨와 우리 가족은 수개월 전 어려운 행동으로 인해 큰 고비를 맞이했다. 주먹질, 머리채 잡기로 가족들이 다치거나 멍이 들었고 유리창이 깨지고 가전제품이 부서지는 일도 잦았고, 재현씨를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면 두려움과 긴장에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가족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현씨의 어려운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슈가 되기 시작했던 21년 초반부터 1년이 훌쩍 넘은 지금은 모든 상황이 안정되었고 평화를 되찾았다.


다른 사람, 다른 가족이 처한 어려움을 돕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인 내가 그들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느낀 점도, 배운 점도 정말 많았다. 한 사례를 다른 사례에 무작정 대입할 순 없겠지만 발달장애인의 어려운 행동, 가족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풀어가는 원칙과 방식은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취지로 재현씨의 어려운 행동을 함께 고민하는 분들을 모시고 여러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을 사례세미나의 이름으로 공개하기도 했었다. 


문제가 잘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께 노력하고 있음을 알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사례를 알려드리고자 시도한 세미나였다. 그 당시에는 시간에 쫓겨 말씀드리기 어려웠던 세세한 사연, 그 이후 지금까지 진행형인 이야기를 여기 공간을 빌어 글로 써보고자 한다. 


23살 발달장애 청년 재현씨는 늘 움직이는 익숙한 동선을 따라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익숙한 가게에서 좋아하는 돈까스도 사먹게 되면서 가족들의 도움이나 돌봄을 받지 않는 시간이 늘어났고 ‘우리 동네 잘 돌아다니는 지적인 청년’으로 성장했다. 가족과 함께이든 따로이든 상관없이 발달장애인의 독립적인 삶을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하고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나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가족들이 의연하게 버텨내기 힘든 수준으로 어려운 행동이 나타난다면 세밀한 상황까지 살펴볼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말을 걸거나 무언가를 하자고 제안하지 않고 최대한 자극을 주지 않으면서(가능하면 지금 상황에 또 다른 변수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발달장애인이 보이는 어려운 행동의 발생 양상을 민감하게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혼자 버스 타고 귀가하고, 엄마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놀러오고, 돈만 있으면 혼자 저녁도 사먹는 발달장애 청년의 변화와 성장에 맞춰 살아온 가족 모두의 일정을 전면 재조정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가족의 귀가시간을 재현씨의 일정에 맞춰 조정하고 재현씨가 가장 힘들어하는 시간에는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엄마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외출했다. 


재현씨의 공격성이 극에 달할 때에는 집에 세 명이 있으면 세 명을 때리고 한 명이 있으면 한 명을 공격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것조차 재현씨에게 부정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었고, 가족에게도 고통이라고 판단했다. 사람을 향한 공격의 양상이나 강도는 발달장애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공격성을 보이는 발달장애인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기 전에 화를 내고 부술 듯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재현씨에게 가장 자극이 적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집 안의 모든 불을 꺼놓고 엄마가 기다리는 방의 불만 약하게 켜놓고 귀가한 재현씨를 맞이했다. 재현씨가 귀가할 때면 최소한의 자극, 즉 인사도 하지 않고 말도 먼저 걸지 않고 눈맞춤도 하지 않고 의자에 고요하게 앉아있는 엄마만 집에 있을 뿐이었다. 유리를 깨서 다칠 우려가 있거나 재현씨가 우악스럽게 달려들며 엄마를 먼저 공격하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엄마가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이 상태가 우리집의 ‘자극이 0값인 상태’이다. 얼마나 대단한 이유 때문에 어려운 행동을 보이는 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주변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이나 말 한마디가 (설령 그것이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재현씨를 자극한다면 우리 가족의 새로운 노력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부터 시작해야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 정신과 병원을 변경하고 약물을 조정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변수를 동시에 뒤섞어 휘저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네 명 가족이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집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극레벨 0값’을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변수가 한데 뒤섞여 시야와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던 상태에서 벗어나 재현씨 행동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게 되면서 조금씩 시야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늘 같은 모습으로 재현씨를 맞이하려고 노력했고 깃털만한 변수가 생겼을 때 재현씨가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지를 꼼꼼하게 관찰하였다. 일관성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니 재현씨도 차츰 평온을 찾아갔다. 다시 말해, 어려운 행동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하루 하루 이어진 것이다.


조금씩 평온을 되찾기 시작하고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누군가 나에게 재현씨의 어려운 행동의 원인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그 대답을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왜 시작했고 왜 지속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해야 줄어들 수 있는지는 알게 되었다. 모래알 같이 작은 변화도 느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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