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과 일


발달장애인의 성인기를 준비하는 기초공사





글 : 정병은/사회학 박사/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운영위원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지환이가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다. 특수학급이 있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인가 대안학교와 위탁형 대안학교를 다니다보니 남들보다 학교를 3년이나 더 다녔다. 생물학적 나이로는 이미 성인인데 사회적 나이로는 이제야 성인기에 접어들었다.


학교에 안다니면 큰일나는 줄 알던 지환이는 작년 12월부터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해왔다. 등교준비를 힘들어 하고 방과후수업을 안하겠다고 어필하였다. 무려 15년동안 학교를 다녔으니 이제는 지겨울 법도 하다. 나도 몇 년 전에 갱년기와 번아웃이 겹쳐서 힘겨웠던 경험이 있던 터라, 이번 방학에는 실컷 쉬게 내버려 두자고 마음 먹었다. 소위 '정상인'이 되기 위해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는 숨 좀 돌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결정해보기로 하였다.


지환이의 성인기 준비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를 고민하는데, 평소 대학생들에게 진로상담해 주면서 강조했던 원칙들을 곱씹어보았다.


1. 길게 내다보아라. 지금 잘 나가는 일이 10년, 20년 후에도 잘 나간다는 보장이 없다.

2. 자기가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이 뭔지를 찾아라. 자기 자신을 잘 알아라.

3. 엄마아빠 말을 듣지 말아라. 내 인생은 나의 것이지 엄마아빠의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과거시대의 사람이다.


발달장애를 가졌지만 지환이도 이 시대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청년이므로 이런 원칙들이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부모라는 명목으로 내가 바라는 미래가 아니라, 지환이가 자신의 존재로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보호와 돌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로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설에서 단체생활하며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삶이 아니라 개성 넘치고 생생한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부모 사후에도 지역사회에서 주민들과 섞여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를 졸업하면 복지관, 평생교육센터, 주간보호시설, 보호작업장 등이 아니면 소속이 없게 된다. 이런 자리마저도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불안감으로 인해서 당장 어디에 취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단순히 취업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개인의 전반적인 생애주기와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성인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소득활동, 즉 취업 말고도 일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 자신의 소질과 적성을 개발하는 일, 타인과 친교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 시민으로서 의견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일, 좋아하고 흥미있는 활동을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일을 준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철저히 장애인 당사자를 중심에 놓고 그의 생각과 의견이 존중되고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와중에 복지관의 사회복지사로부터 개별중심계획(PCP)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느냐는 문의가 들어왔다. 장애인 당사자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에 대한 꿈, 목표 세우기 활동을 1회기 진행하는데, 전문가와 그래퍼가 도와준다고 한다.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 그리고 장애인 당사자와 친분있는 지인들이 함께 꿈찾기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친분있는 지인이란 지환이가 친하다고 느끼고, 상대방 역시 지환이를 이해하고 지환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의 인물을 뜻한다.


진로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던 참이라서 기꺼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2년 가까이 동구밭에서 지환이와 텃밭 활동을 같이 한 짝궁 대학생에게 참여 의향을 물었더니 기꺼이 수락하였다. PCP 프로그램에서는 전문가가 주도하여 장애인 당사자, 부모, 친분있는 지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답변을 하면 그래퍼가 이해하기 쉽게 시각화하여 정리해 준다.


전문가는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에 관한 전반적인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꿈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서 점점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사회복지사들은 이 과정에서 그들이 제공할수 있는 다양한 지원들에 대해 조언한다. 2시간 동안 추상적이고 막연한 생각들이 1년, 6개월, 1개월, 3일을 단위로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로 점점 구체화되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을 소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장애인 당사자에게 '우선적으로' 묻고 그의 말을 인내심있게 경청한다. 부모는 후순위이다. 지환이가 삼천포로 빠지거나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합당하지 않은 얘기를 해도 끝까지 듣는다. 지환이는 자신의 말을 끊지 않고 길게 들어주니까 입에 엔진을 달아놓은 듯이 말을 쏟아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우웽?? 얘가 이런 생각도 하네??'' 싶은 상황이 적지 않았다. 부모라고 해도 자식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다.


2. 친분있는 지인의 의견을 듣는 점은 완전히 신선했다. 상담을 하면 거의 대부분 엄마의 의견으로 장애인 당사자의 미래가 결정되곤 한다. 그런데 제 3자의 의견도 보탠다니 획기적인 경험이었다. 지인은 집이 아닌 장소에서 지환이를 만나서 다양한 활동을 했으니 지환이의 특성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행동을 집밖에서는 했던 것이다.


3.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오갔던 모든 의견들이 시각화되었고 그 결과물을 통째로 장애인 가족에게 건네주었다. 2시간씩이나 장애자녀에 대해 상담한 적도 처음이지만, 그 내용을 온전하게 기록해서 전달받은 적도 처음인 것 같다. 많은 경우 상담내용은 문자로 기록되므로 장애인 당사자는 이해할 수 없고 배제된다. 그나마도 간략하게 요약해서 기록되므로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나서 다시 들여다보면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다.







PCP 프로그램을 마치고 참여자들의 의견에 기반하여 어떤 것은 장.단기 계획을 짜고 있고 어떤 것은 실행하고 있다. 앞으로 지환이의 앞날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는 없지만, 생애주기의 관점에서 준비하다 보면 지환이의 특성과 강점을 살리는 성인기를 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인 내가 조급해 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지환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연습하고 준비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나의 이기적 욕심과 과도한 보호가 성인이 된 지환이의 앞날에 장애가 되지 않기를!!



※ 위 글은 <함께웃는재단> 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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