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유언의 기록 첫 장

김석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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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23:22


글 : 김석주 (자폐청년의 엄마/ 음악치료사/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부산지부 부지부장)


중국의 한 자폐아 아빠가 심장마비로 죽음에 이르던 순간, 아들을 돌볼 때의 주의사항을 문자로 유언한 내용의 기사가 있었다.


‘아들 샤오린이 뇌전증을 일으킬 때 2분 정도 후면 진정되니 놀라지 말라.’

‘화장지를 찢고 놀 때 말려도 되지 않으니 한 통 다 찢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지만, 누군가가 곁에서 새 옷을 챙겨주어야 한다.’

‘선한 심성을 가졌지만, 상대방에게서 위협이 느껴질 땐 공격성을 보일 수 있다.’

등의 내용이었다.

 

죽음 직전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온통 남은 아들에게만 집중한 아빠의 마지막 사랑은 뭇사람들에겐 감동을 주었고, 같은 자폐성장애 자녀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현실적인 아픔과 걱정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언제 어느 때 일어날지 모르는 이별을 위해 유언을 미리 남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어떻게 써놓아야 낯선 타인들이 아들과 함께할 때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학교와 복지관 등 공적 기관에 아들의 개인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장애명과 점수로 기재된 인지, 신체 기능, 언어 수준, 그리고 어려운 행동 특성 몇 가지일 것이다. 장애등급을 받을 때 진단 검사한 기록은 병원과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봉해져버려 개인의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타 기관과의 공유가 차단되어 있다. 그나마 공유가 된다 해도 10년 간격으로 재검사해도 별 차이 없는 점수, ‘지능지수 50에 5세 수준의 사회성’으로만 아들의 24년 인생을 규정지어버리고 말 것이다. 


샤오린 아빠의 유언은 이런 의미 없는 진단 기록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관찰과 대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독특한 행동의 이유는 이러하니, 저런 방식으로 대처하면 안정과 해결이 된다.’

즉 일반적인 시선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감각추구나 인지 부족 또는 정서적 방어 때문이다. 이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다르게 일어날 수 있으니, 전후 환경을 먼저 살피고 적절한 허용과 기다림, 또는 보완적인 개입으로 대처해달라는 바람직한 행동지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스스로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자폐성장애인들의 관찰과 대처는 이렇게 ‘A-B-C (사건-행동-결과)’의 기록으로 누적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또한 해마다 정기적으로 ICF(기능·건강·장애의 국제 분류)의 ‘활동과 참여’ 척도에 따른 전반적인 변화 정도도 기록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개인의 장애 정도가 아닌, 사회적 환경 속에서 활동에 참여하는 경험과 실제 능력 정도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도록, 9가지의 척도를 제시한다. ‘학습과 지식 적용, 일반적 과제와 요건, 의사소통, 이동, 자조활동, 가사활동, 대인관계, 교육과 직업생활, 지역사회생활’이다. 


여기에 아들에 대한 간단한 기록을 2019년의 첫 유언으로 남기며, 발달장애 부모들과 함께 유언의 기록 바람이 불기를 기대한다.


1. (학습과 지식 적용)

상형문자를 즐겨서 한자 6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영어의 알파벳을 발음대로 읽고 쓸 수 있다. 가전제품이나 지능로봇 조립 설명서를 읽고 프로그램 입력 때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슈퍼마켓에서 원하는 물건 고르기, 식당에서 음식 주문하기, 공공기관의 안내판 읽기 등에 활용할 수 있다.두 자리 덧셈 정도는 가능하나, 실제 돈 계산은 실수가 많다. 계산원을 대하는 것보다 터치스크린 기기의 결제 방식을 더 편하게 이용한다. 


2. (일반적 과제와 요건)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작업과제를 스스로 집중하여 완성할 수 있다. 단순한 반복보다는 바느질, 조립 등 시각적인 설명서나 견본에 따른 전체적인 공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성하는 것을 즐긴다. 중도에 멈추기를 싫어하므로, 쉬는 시간과 작업시간의 분배를 미리 알려주어야 한다. 


3. (의사소통)

아들의 말은 발음이 어눌해서 상대방이 못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럴 땐 펜과 종이를 주거나, 핸드폰의 메모장을 열어주면 글자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단 감정표현이나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은 어렵다. 


4. (이동)

노선도와 시간이 명확한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이상의 거리를 환승하여 다닌다. 그러나 버스로 이동 시에는 내릴 찰나를 맞추지 못해 목적지를 지나쳐버리고 당황할 수 있다. 


5. (자조활동)

주말마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를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정하고 다닌다. 선호하는 음식메뉴는 상황에 따라 타협하여 변경할 수 있으며, 노래방, 극장, 산책 등을 즐기며 미리 정하지 않아도 즉석에서 응하고 참여할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다니기를 원하며 즐긴다. 


6. (가사활동)

세탁기에 세제를 넣고 버튼을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옷을 색깔이나 소재별로 분류하지 못한다. 빨래를 털어서 걸고, 말린 후 수건만 삼단접기로 갤 수 있다. 혼자서 짜파게티나 라면을 맛있게 정량으로 끓여먹고 냄비를 씽크대에 갖다놓는다. 수박의 속만 잘라서 밀폐용기에 담아놓는다. 냄새에 민감하여 상한 음식을 먹지 않으며, 우유 등 날짜를 보고 유통기한이 지난 것을 골라낼 수 있다. 환절기 때 짧은 소매옷과 긴 소매옷, 점퍼의 두께 정도를 적절히 골라입지 못한다. 날씨와 온도를 체크하여 옷의 길이와 두께를 맞추도록 연습 중이다. 목 뒤와 옆솔기 라벨의 촉감을 싫어하니, 미리 제거해주어야 한다. 


7. (대인관계)

형과 동생, 선생님과 이웃사람 등을 잘 구분하지 못하며, 높임말과 반말도 상대에 따라 적절히 쓰기 어렵다. 가족이나 매일 만나는 담당교사와 동료들,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교사들의 이름과 몇몇 사건을 오래 기억하고 있으나, 연락을 하거나 찾지는 않는다. 초등학교 때 긴 머리의 상냥한 여학생에겐 졸업앨범을 꺼내보며 그리움의 미소를 짓는다. 


8. (교육과 직업생활)

- 학교의 기록이 필요하다. 


9. (지역사회생활)

- 복지관과 타 기관의 기록이 필요하다.

 

10. (그 외 특성)

- 시간 약속에 대한 강박이 있다. 공부나 일의 시작과 마치는 시간이 10분만 늦어져도 혼란스러워하므로, 시간 변경 시 이유와 다음 예정시간을 미리 알려주어야 한다. 하루의 일과 뿐 아니라, 몇 년, 몇 월, 몇 일까지 정해진 약속을 기억하고 연간일정을 스스로 실행한다. 예를 들면 9월 1일에 에어컨 커버를 덮고, 10월 1일에 카페트를 깔고, 11월 1일에 온풍기와 전기장판을 꺼낸다.

 

- 지하철 노선안내도의 부착상태를 점검하는 취미가 있다.

지하철 이동 시 각 칸을 다니며 노선안내도의 변경된 부기역명 등이 동일하게 스티커 부착되었는지를 점검하고 빠진 것이 있으면, 폰사진으로 찍거나 종이에 적어두었다가, 매주 부산교통공사 홈페이지에 민원을 올리고, 답변을 기다린다. 그리고 약속한 일정에 시행되었는지 다시 점검에 들어간다.


 

 

* 이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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