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상윤씨의 이야기 : 세번째

김성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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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6 20:07




평생 내가 밥을 차려줘야 할지도 모른다 싶었던 아들이 열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밥상을 차리기까지 지나온 행보를 연작으로 펼치는 이야기입니다.====(2)삼대 가정 시대로 진입하다====


 큰댁이 자녀 교육에 매진하느라 교육열 펄펄 끓는 동네로 이사를 나가자 축대 아래 내려다보이던 부모님 댁 너른 마당과 차고 위 ‘비밀의 밭’이 드디어 내 차지가 되었다. 장애와 비장애라는 양극단의 교육 영역에서 널뛰기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상윤이가 초등학교 2학년 되던 해 부모님 댁으로 들어갔다. 일손이 부족하던 옛 농촌에서는 발달장애인들도  동네일을 도우며 나름대로 제 몫을 했다는 어른들의 말씀도 있었고 삼대 가정 안에서는 상윤이의 일상에도 더 많은 변수가 생겨 경험이 풍부해지고 말을 할 기회도 더 많아지겠다 싶어서 자청해서 살림을 합쳤다. 이후 약 십 년은 그때 내 입을 틀어막지 않은 일이 너무도 후회될 만큼 힘들었지만, 또 칠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내 인생 다섯 손가락 꼽을 정도로 잘 한 결정이라 할 정도로 축복이 되었다.


  네 식구에서 여섯 식구로 늘다 보니 상윤이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래 윗 층으로 오르내리며 식사 준비에서부터 상을 차리고, 심부름을 하며 식사 후 상을 치우는 일까지 상윤이가 도움을 주는 일을 조금씩 늘려갔다. 부엌일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먼저 모든 과정을 단순화 시켜 순서와 규칙을 만들었다.  자폐성 장애인들의 특징인 ‘규칙 세우기’를 일상에 적용해 보면 의외로 합리적인 부분이 많아 지금도 나는 그 부분을 참고하여 생활에 많이 활용하고 있다. 싱크대와 냉장고 속 모든 물건의 자리를 정해놓고 ‘물건 찾아오기’를 놀이처럼 일상으로 집어넣었다. ‘냉장고 왼쪽 야채 칸에서 오이 하나 꺼내다 줄래?’라고 부탁하면 주의를 기울여 듣는 일, 위치 파악하기와 지시 따르기 등 여러 영역을 연습할 수 있었다. 


찾아올 때까지 (혼신의 노력을 다해) 기다리고, 찾아오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을 해주다보니 나도, 아이들도 참 기분이 좋아졌다. 한 가지씩 일을 시키고 잘 되면 또 한 가지를 붙여서 연습을 시키면서 충분히 잘 될 때까지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기다렸다. 지루하지 않도록 각 영역을 조합해 심부름 놀이를 했다. 예를 들어, 물건과 행위, 물건과 위치, 물건과 물건을 조합해서 심부름을 시키다가 잘 하게 되면 한 가지 영역을 덧붙이는 것으로 머리를 쥐어짜며 아이들에게 권유와 부탁을 했다.상윤이와 딸아이에게는 각자 고유의 업무를 주기 시작했다. 아들은 따로 부탁하지 않으면 딸아이의 업무에 손을 대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아직도 남아있긴 하지만,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오던 아이들이 가족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면서 자신감이 늘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배우는데 큰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기다려주고, 참여시키면서 아이들의 자존감도 높아지고 할 줄 아는 일들이 점점 늘어갔다.  가끔씩 딸아이는 ‘우리는 어린이 노예였어요.’라고 뼈있는 농담을 하는데 이웃들이 보고 속으로 놀랄 만큼 일을 많이 하긴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덕분에 두 아이는 살림 하나는 똑 소리 나게 잘 사는 청년들로 성장했다고 자부한다. 넓은 마당과 밭이 있는 주택에 살면서 고추를 따고 물을 주는 일상을 누리며 도시 아이들답지 않게 자연과도 한층 가까워졌다.

 

일요일 오후, 교회에 다녀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간식을 담당하는 일은 오롯이 상윤이의 몫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굽는 것에 남다른 재주가 있는 아들은 절편을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 커피 한 잔과 함께 차려 드린다. 아들의 믹스커피 타는 솜씨는 유명하다. 한 번 가르쳐줬더니 물의 양을 기억했다가 ‘황금비율’을 적용한 한결같은 맛으로 타온다. 지친 오후 온몸 세포가 달달한 커피를 부를 때, 숨은 더듬이를 뻗어 신호를 인식한 듯 '커피 한 잔 타드릴까요?'라며 상윤이가 물어오면, 우리 모자 사이에는 말없는 교감의 터널이 생기고 어깨에 내려앉은 해묵은 피로의 그림자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요즘엔 커피메이커로 아주 맛있는 커피를 내린다. ’아침에는 커피를 조금 진하게 마시면 좋은데.’라고 스치는 말 한 마디 한 것을 기억했다가, 그 다음날 ‘아침이라서 조금 진하게 내렸어요.‘라며 자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커피를 내오는 아들 앞에서 전율 같은 사랑스러움을 느낀 적도 있다.  


유치원 시절, 케익 자르는 플라스틱 칼로 버섯 썰기에서 시작하여 초등학교 3 학년 즈음부터 과일을 손수 깎아먹게 했다. 대식구라 과일을 아무리 많이 깎아도 내 입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아이들도 함께 과일 깎기를 시도했다. 톱니 있는 빵칼이 비교적 덜 위험해서 사과 깎는 것부터 연습시켰는데, 처음에는 거의 과육을 뜯어내다시피 해서 반만 남았지만, 연습을 거듭하다보니 차차 얇게 껍질을 벗길 수 있었다. 이후 과일을 깎아서 차리는 일은 시키지 않아도 상윤이의 몫인데, 세심한 그는 종잇장처럼 껍질을 얇게 깎는다.(아까워서 그런단다. 알뜰도 하다.)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옛말이 있다. 하도 들어 식상한 조언이긴 하지만, 아들과 내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되는 말씀이다. 처음엔 물고기가 아들을 잡아먹을까 봐 감히  잡는 법을 가르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들보다 하루 늦게 죽기만을 마냥 바랄 수는 없는 법. '남들이 고래를 잡으면 우리는 멸치라도 잡자'..하는 마음으로 아주 조그만 걸음부터 옮기기 시작해서 수없이 엎어지고, 깨지고, 코피 터져 가며 걸어온 길이다.


 아이에게 집안일을 가르치면서 가스 불을 쓰는 훈련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불을 너무 무서워하던 아이라 어찌나 긴장을 하던지 옆에서 가르쳐 주는 내 등에도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적어도 수백 번은 연습을 한 듯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일상의 대화가 제대로 안 되었기에 상윤이에게 새로운 행위를 가르칠 때면 커다란 종이에 순서를 적게 해 외울 때까지 읽도록 시켰다. 불을 쓰기 위해서도 매뉴얼을 만든 다음, 계속 안심을 시키며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하나하나 순서대로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아마도 곁에서 과정을 지켜보는 내 가슴에는 가스불보다 몇 배는 큰 불덩어리가 이글거리고 있었을 듯하다. 결국 중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스 렌지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상윤이가 가장 먼저 가스 불을 켜서 만든 요리가 ‘짜파게티를 이용한 즉석짜장’이었는데, 아직도 끓이는 과정을 적은 매뉴얼을 기념으로 보관하고 있다. 요즘에는 할로겐 쿡탑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서 점화를 하지 않아도 불을 사용할 수 있고, 컵라면조차 전자렌지를 이용해 끓여먹게 되었으니 역시 환경을 바꾸는 일이 장애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교과서 없이 스스로 자료를 찾아서  공부하는 일이란, 막상 해보면 참 고달픈 작업이다. 교과서의 수준은 각자가 맞추기 나름이고, 진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약 내게 ‘자폐아동 양육 지침서’가 있었다면, 아이의 상태에 맞게 참고해서 늘이고 줄이면 될 것을, 참고서 하나 없이 소위 '맨땅에 헤딩하며' 아들과 함께 엎어지고 자빠지며 더듬어 왔다. 비록 표지판에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할 지는 가 봐야 압니다.'라고 적혀있을지언정, 오는 길에 가로등 하나, 이정표 하나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까. 지금까지 아들을 키우며 지나온 흔적을 사진과 글로 남기는 이유는  우리의 뒤를 좇아오는 발달장애 어린이들과 부모에게 미약하나마 참고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다음 회에 계속 됩니다~


- 남영/부모/한국자폐인사랑협회 운영위원/발달장애지원 전문가 포럼

 

※ 위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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