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자폐(ASD), 이제 다시 생각해야 할 때
작성자: 김성남

서론: 자폐 진단 체계를 다시 생각하며
자폐스펙트럼장애(ASD) 진단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습니다. 현행 진단 기준이 자폐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진단 프레임의 근본적인 변화는 꽤 오랜 시간 지체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야 "자폐를 재개념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여전히 학계와 임상 현장에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 지배적입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환하는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이 예상됩니다. 이 글에서는 과학철학적 관점의 '정신장애 정의'를 빌려 자폐의 현주소를 진단해 보고, 현재 사용 중인 DSM-5 진단 기준이 합리적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정신장애를 어떻게 분류하고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대 정신병리학에서 이 논쟁은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실재론 (Realism): 질병이 자연 세계에 분명히 실재하며,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진짜 병'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실용주의 (Pragmatism): 진단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보다는, 치료나 지원처럼 현실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고 유용한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입니다.
구성주의 (Constructivism): 질병의 정의가 사회·문화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는 생각입니다. 생물학적 원인만큼이나 사회적 맥락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엄밀히 말해 정신장애를 생물학의 '종(species)'처럼 명확히 딱 떨어지는 실체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전적으로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만 치부하면 현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한적 실재론(Limited Realism)'이 제시됩니다. 이는 경험적 연구 결과들과 잘 맞아떨어지고 임상적으로도 타당하다고 판단될 때, 그 진단을 실재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자는 입장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현재 우리 분야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접근법일 것입니다.
자폐 진단, '제한적 실재론'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과연 현재의 자폐(ASD) 진단은 이 '제한된 실재론'의 기준을 충족하고 있을까요? 유전학, 뇌 영상학, 행동 특성 및 치료 효과 등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하나의 일관된 '자폐'라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폐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현행 자폐 진단의 모호함
현재의 자폐 진단 체계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뇌 과학과 유전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결과들은 여전히 "이것이 자폐다"라는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전자 연구: '자폐 유전자'라고 할 만한 것은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폐, ADHD 등 여러 신경발달장애가 유전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장애 간의 경계가 더욱 모호해졌습니다.
뇌 영상 연구: 자폐인의 뇌를 촬영한 결과들 역시 제각각이며, 자폐인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이적인 뇌 패턴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행동 연구: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봐서는 그 기저에 복잡하게 얽힌 언어, 감각, 지각, 운동 능력 등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지금의 진단 기준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서로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다각도의 연구 결과들은 단일한 실체로서의 '자폐'를 지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폐적 특성은 일반인의 특성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자폐는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자연이 정해놓은 하나의 명확한 종류(Natural Kind)는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방향: 메타 용어(Meta-terms)로서의 접근
수십 년간의 연구가 뚜렷한 답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가 가져올 혼란과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우려 때문에 진단명을 바꾸는 일은 미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폐를 바라보는 새로운 청사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지 장애'나 '언어 장애'의 사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독립된 진단명이라기보다는 더 큰 개념을 설명하는 '메타 용어(Meta-terms)'*로 쓰이며, 진단 시 부가적인 설명으로 활용됩니다. 자폐의 핵심 특징인 사회적 의사소통의 어려움이나 상동 행동이 인지나 언어 문제와 본질적으로 다른 범주는 아닙니다. 따라서 자폐의 핵심 요소들 역시 각각의 메타 용어로 다루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습니다.
'자폐'라는 커다란 상자를 열고 그 안의 구성 요소들(사회성, 상동 행동, 감각 문제 등)을 각각 독립적인 개념으로 다시 정립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쌓인 과학적 발견에 발맞추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폐'라는 단일한 이름표 대신, 각 영역별 프로필을 작성함으로써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꼭 필요한 맞춤형 지원을 구체화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연구실과 임상 현장의 언어를 통일하고 그 간극을 좁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맺음말: 진정한 맞춤형 지원을 위한 용기
변화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따르지만, 전문가들은 자폐의 정의를 재정립하는 과제에 용기를 갖고 임해야 합니다. 과학적 진실에 더 가까운 개념을 당사자와 우리 사회에 제공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이 고도화된 지금, 굳이 구시대적인 분류 체계에 안주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폐'라는 진단명이 없더라도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지원과 교육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임상과 과학의 거리를 좁히고, 아이들에게 진정한 '맞춤형' 도움을 주는 길입니다. ASD라는 진단명이 사라지면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까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우리 사회의 관심을 더 넓은 곳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Lombardo MV and Mandelli V (2022) Rethinking Our Concepts and Assumptions About Autism. Front. Psychiatry 13:903489. doi: 10.3389/fpsyt.2022.903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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