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실패할 자유: 민주적 인권

김석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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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0 14:12

“나는 이것을 원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니?”

나의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고,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 이면의 마음을 듣는 것. 이것을 '민주적 대화'라고 한다. 일방적인 지시나 강요, 또는 일방적인 순종이나 포기가 아닌 서로 다른 기질과 습관과 욕구를 가진 타인과 의견을 조율하는 것, 즉 서로가 적절히 양보할 수 있는 제 3의 대안을 찾아내고 합의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권위적 대화'는 연령이나 관계의 서열상 수직적 상위에서 “너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라고 일방적 지시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경험을 통한 사회적 전통이나 관습을 내포하기에 아래 위치의 사람이 반박이나 거부를 하기 어려운 상황들이다. 그래서, 납득이나 이해가 되지 못한 채로 계속적으로 순종하는 의존적 상하관계가 되기 쉽다.


'허용적 대화'는 “너 마음대로 해라. 나는 모르겠다.”라는 방치 혹은 우유부단의 태도를 보임이다. 자녀를 지나치게 염려하여 과잉보호하거나, 자녀가 강자로 위치하여 쩔쩔매는 부모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이 때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녀의 심리는 자유로움이나 성취감이 아니라, 숨은 죄책감을 망각하려는 합리화의 혼돈에 처하게 된다. 이는 고집이나 흥분, 변명과 회피로 불안정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위 세 가지 유형의 대화방식은 약자의 연령이나 능력보다는, 강자의 위치에 있는 부모나 교사, 상사들의 가치관과 습관에 의해 주로 좌우된다. 즉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와도 민주적 태도를 취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스무 살, 서른 살, 장성하여 결혼한 자녀에게도 권위적으로 지시하는 부모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부모들은 때에 따라 다르게 세 가지 유형을 오가지만 어느 정도 한 쪽으로 치우친 경향을 보인다.


인지력과 의사소통의 장애를 가진 발달장애 자녀들에게 부모들은 주로 어떤 경향을 보일까? 대체로 순하고 인지력이 부족한 자녀에게는 일방적인 지시와 보호가 이뤄지기 쉽고, 과잉행동이나 감정폭발을 가진 자녀에게는 허용과 억압의 양극단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장애자녀에게 상황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과정은 가족들에겐 불가능한 미래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니?”

입으로 소리내어 한 번 읽어보자. 이것이 그토록 어려운 대화일까?


갓난아기가 울 때 엄마는 말한다.

“배가 고프구나. 우유를 타줄게. 조금만 기다려.”

“잠이 오는구나. 어부바하고 자자꾸나.”

상대가 원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읽어주고 반응한다.


그리고 주고받는 행동을 시도한다.

“까꿍~ 어머나, 우리 아기 웃네!”

“도리도리 잼잼, 잘 따라하는구나!”

“맘마먹자. 싫어? 아직 배가 안고픈 게로구나.”

엄마가 원하는 것은 눈맞춤과 모방과 섭식이지만, 자녀가 그대로 반응하지 않을 때 왜 그러한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파악하여 제 3의 대안을 마련한다. 민주적 대화방식은 이와 같이 영아기 때부터도 충분히 가능하다.


언어와 인지가 어려운 발달장애인에게도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실물로든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경험부터 민주적 관계의 형성을 시도할 수 있다.

“나는 짜장면을 먹고 싶어. 너는 무엇을 먹고 싶니?”

“나는 빨간 셔츠를 사고 싶어. 너는 무슨색이 입고 싶니?”

“나는 일요일에 바다에 가고 싶어. 너는 어디로 가고 싶니?”


같은 상황에서 흔하게 저지르는 권위적 대화는 아래와 같다.

“짜장면은 흘리고 옷에 묻히니까, 볶음밥을 먹자.”

“너는 남자니까 파란셔츠를 입으렴.”

“바다는 위험해서 안 돼. 산으로 가자.”


건강이나 신변에 위험을 주는 경우가 아닌 대부분의 상황들은 자녀 스스로 실패와 불편함을 경험하게끔 해야 선택의 가치를 납득할 수 있다. 즉 짜장면을 흘리고 묻힐 때의 끈적함을 겪어보아야 깨끗이 닦은 후의 청량감을 알 수 있다. 그 후의 선택은 여전히 짜장면을 먹고 닦는 것일 수도 있고, 짧게 잘라서 먹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메뉴를 고르는 것일 수도 있다.


성별에 따른 의복이나 기호품은 현대사회에서 구분을 해체하는 경향이긴 하나, 전통적인 시선을 전혀 무시할 수 없기도 하다. 분홍이나 빨간 옷, 퍼머머리, 그리고 색조화장품까지도 젊은 남자들은 흔하게 사용하며 소변보는 자세도 양변기에 앉아서 누도록 권장하고 있다. 패션쇼에서는 치마를 입기도 하니, 의복에 대한 기준이라면 성별이나 미적 기준보다 때와 장소, 역할에 따른 의복의 편리성과 활용성을 인지시키는 게 나을 것이다. 운동할 때 치마보다 바지가 편한 점, 작업할 땐 너무 부드럽거나 두꺼운 옷감이 불편한 점 등 이 또한 경험을 통해야만 가능한 셈이다.


엄밀히 말하면, 위험한 상황조차도 경험이 필요하다. 위험한 바다는 수영장에서라도 물을 들이켜본 경험이 필요하고, 위험한 차도는 움직이는 물체에 부딪혀 다쳐본 경험이 필요하며, 거친 산길은 집 앞 보도에서라도 넘어져본 경험이 있어야만 인지할 수 있다.


필자의 아들이 어릴 때, 이웃분이 집에 오셔서 이런 충고를 하셨다.

“이런 장애아이들에겐 세 가지를 절대 주면 안된다. 불, 칼, 끈...”

그 날부터 아들에게 과도로 과일을 썰게 하고, 촛불의 촛농과 뜨거운 주전자를 만져보게 하였다. 아들이 호기심으로 잘라 가위날이 펑펑 터지던 전기선도 함께 구리선을 벗겨 검정테이프로 이어붙이면서 보이지 않는 불의 힘을 이해시켰다.


언어를 모르고, 타인과 자신의 경계를 알 수 없고, 사회의 질서와 규칙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보이고 들리고 만지고 느끼는 감각만으로 세상의 원리를 배워야하는 발달장애인에게는 오직 경험과 반복 밖에 길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


실패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명령하여 의존화되거나 울화와 떼쓰기에 멈춘 상태보다는, 경험한 만큼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의 위험을 예측하며, 내 취향의 즐거움을 아는만큼 상대에게도 취향이 있음을 알아가는 흔들림의 상태가 건강한 성장이다. 그제서야 발달장애 자녀도 부모에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원해요. 엄마는 무엇을 원하세요?”



* 글쓴이: 김석주(자폐청년의 부모/ 음악치료사/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부산지부 부지부장)

* 이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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