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손을 놓을 준비, 떠나보낼 용기

정유진님

0

1913

2018.12.03 21:51




장애인복지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치료의 황금시간대라 할 수 있는 3~5시 대의 근무를 포기하고 오후 3시까지밖에 일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시간에 하교하던 아들 재현이 때문이었습니다. 활동지원바우처의 대상이 지적장애 2급까지 확대되던 시기 전까지는 하교 후 재현이의 삶을 챙기는 일은 오롯이 엄마인 제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활동지원 혜택이 재현이의 장애급수로까지 확대된 것과 상관없이 활동보조와 관련해서 진작부터 마음속에 결심해 두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그 순간까지 목격했던, 그런 방식의 활동지원은 받지 않으리라.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제가 목격하는 활동지원 특히 이동보조의 모습은 온전하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활동보조 선생님의 도움으로 인해 이전까지 장애자녀의 양육에 온 삶을 다 바쳐야했던 부모님들이 휴식을 얻게 된 순기능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동선 이동과 관련한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생김으로써 부득이하게 싹트게 되는 부모님들의 무관심과 나태함을 여러 사람에게서 목격하게 되면서 ‘부모의 부담과 손을 덜어주는’ 활동보조에 대해 나름의 원칙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활동지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이동보조와 관련해서, 활보를 쓸 수 있게 되면 일단 무조건 쓰고 보자는 생각보다는 활동전환과 이동에 대해 최대한 해볼 만큼 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현이 개인의 능력과 지역사회의 지원과 배려가 어느 꼭짓점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 최대치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로 지원을 덜컥 받을 수는 없다는, 오기 비슷한 것이 발동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수업이 끝난 후 방과후 활동으로 이어지는 사이의 빈 시간을 ‘재현이다움’으로 채우려하지 않고 활보 선생님이 옆에 함께 해준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옆에 있게 되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얌전히 있는 감자다워야 모두가 만족하는 식의 지원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 당사자에게 아무런 활동을 기대하거나 허용하지 않은 채로, 그저 말썽 없는 착석만을 기대하는 것은 감자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 잘못임을 지적한 예전 글이 있습니다.)


활보 선생님이 늘 재현이의 손을 잡고 다닌다면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늘 정해진 동선을 따라 일정한 시간표대로 오가며 살았을 테지요. 그런 활보샘이 계셨다면 저는 마음 놓고 저녁까지 일하며 어느 날 제안 받은 정규직 자리도 걱정 없이 승낙했을 테지요. 그러나... 그런 방식의 지원은 물샐 틈 없이 완벽할 수는 있었을 테지만 실은 재현이가 진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더 채워야 하는지를 알 길 없이 완벽하게 차단당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현이를 누군가의 손에 넘겨주는 대신 재현이의 손을 놓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재현이의 손을 놓을 준비, 떠나보낼 용기를 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이라도 해보리라 작정했습니다. 


그 몇 년간의 노력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재현이는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며 학교와 복지관, 집을 단독 통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최종의 성적표만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돌아오는 반응은, “아들이 똘똘해서” 또는 “원래 할 수 있었으니까” 등입니다. 아이큐 50을 넘지 않는 지적장애인에게는 대단한 과찬입니다.  


이동하는 동선 중의 짧은 시간동안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어서 물건을 발로 차거나 던져버리기도 했고, 일정이 바뀌는 학년초나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동선을 헷갈리는 바람에 오기로 한 곳에서도 없어지고 가기로 한 곳에서도 없어지는 행방불명의 헤프닝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방과후에 잠깐 재현이의 행방이 묘연했으니 이 아슬아슬한 삶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다른 발달장애인 가족이 준비하고 용기낼 수 있는, 혼자만의 씩씩한 세상살의 모양새가 전부 재현이의 것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재까지 재현이가 받아든 성적표는 ‘혼자 버스 타고 학교 등하교하기’이지만 누군가의 성적표는 ‘활보샘의 자동차로 이동하기’일 수도 있고 ‘활보샘의 손을 꼭 잡고 버스타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적표가 한치의 오류나 실수조차 시도되지 않고 허용되지 않은 완벽한 유리벽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장애자녀의 부모들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부모가 없을 미래에 장애자녀의 삶을 상상하고 걱정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늘 최선의 지원을 미리 마련해주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지원의 가이드라인은 우리네 걱정많은 부모가 아니라 우리없이 살아갈 자녀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한 도움과 배려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손을 놓을 준비와 떠나보낼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정유진 : 부모 / 유아특수교육 석사 / 행동분석가 / 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교육위원


* 이 글은 <함께 웃는 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twitter facebook googl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