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학교와 장애부모가 함께 한다는 것

정유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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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21:42




우리 광희는 본인을 23세의 자폐청년이라고 한다. 나는 광희를  21개월부터 치료를 시작했다.

나는 일찍 광희의 이상한 점(자폐행동)을 발견했다. 여러 병원을 거쳐 놀이치료와 작업치료를 시작하며 온갖 치료의 세상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만 4년 만에 알게 되었다. 평생 아이를 위해 스탠바이 상태로 사느냐 아니면 느리지만 그래도 스스로 세상을  해쳐 나갈 수 있게 도울 것인지를 고민하며 후자에 마음의 무게가 실렸다.


내가 사는 고양시에 유치원 과정이 있는 특수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통합교육 관리시스템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음에도 통합을 적극 권장했다(어릴 때 통합하지 않으면 통합의 기회가 많지 않을 것만 같았다). 부모가 통합을 위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뚫으면 나름의 시스템으로 통합 지원을 체계적으로 실천하기도 했다. 밝은 학교에 학생이면서 정기적으로 담임교사가 통합교육 상황을 점검하고 협업하는 과정에 우리 광희는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초등과정도 통합교육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막상 결정을 내리니 초등학교 입학에 어려움들이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나는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0.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간다. 걸어서 통학하고 학교친구가 이웃친구가 될 수 있도록

0.잘 아는 친구와 부모가 있는 학교일 것.


통합이 목적이면서 특수 지원을 받으려면 먼 거리를 통학해야 했다. 과감히 가까운 학교를 선택했다. 광희가 입학한 학교는 1학년이 11개 반이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 속에 광희는 자연스레 묻히게 되었고 나름 괜찮은 통합이었는데 아쉬움이 있었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건 너무 힘들었다. 나는 광희에게 통합을 하면서 관계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 (수없이 가르치고 연습해야 습득되었기에). 학교에 학생들 스케줄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원 생활도 하고 이웃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골형 학교를 선택하기로 했다.


우리가 가기로 한 시골에  몇 학교를 조사해보니

0.새로 신설된 특수학급이 있는 4학급 학교.

0.특수학급이 없고 1개 학급이 있는 시골형 학교

0.특수학급이 없고 3개 학급이 있는 역사가 오래된 학교


3번 학교 주변에 있는 보습학원, 태권도장, 피아노학원, 내과의원, 약국, 마트가  각각 하나씩 주변에 있는 좋은 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사와 전학을 결정했고, 12월에 걸어서 통학할 수 있는 거리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전학을 하기 전에 먼저 태권도장을 먼저 다녔다. 나는 태권도장에 같은 또래 아이들과 친해져서 이름도  알고 인사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관장님의 배려로 가끔 바나나와 초코 음료로 인사하며  광희 자폐성장애를 도장 친구들에게 알렸고, 꼭 부탁에 몇 마디를 잊지 않고 말했다. 광희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는데, 말을 못하니 먼저 말을 걸어달라고.....

 

나의 밑작업은 성공이었다. 3월 2일, 새 학교에 전학을 했지만 태권도장 친구들 덕에 자폐 박광희는 유명해졌고, 아이들은 새 선생님께 광희에 대해 설명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들에게 다가가기로 결심 했다. 일단 광희책상 주변에 친구 엄마들에게 전화를 하고 과일주머니를 들고 집집마다  놀러 다녔다. 그리고 광희의 장애에 대해 설명하고, 장에와 비장애가 함께 하면 모두가 성장한다고 역설하면서 다녔다 . 그 중에서 긍정적인 엄마 몇 명과 친해지고, 몇명 엄마들은 나를 피하고 이상하게 보는 이도 있었다.


새 담임 선생님은 신설된 가까운 특수학급 교사와 상담을 자꾸 추진하셨다. 나는 그 분을 만났다. 그리고 통합교육의 의지를 말씀드리고 확인하는 자리로 활용했다. 그렇게 바쁘게 봄을 보냈던 중에 5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4월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연세가 좀 있으셨고 신앙이 좋은 분이셨다) 내게 연락을 하셔서 만났다.


“어머니, 의논드릴 게 있어요. 5월에 어린이날 운동회를 해요. 그런데요.......

2학년은 꼭두각시 춤을 추는데요......광희가 전학을 오면서 우리 반이 홀수라 광희만 남게 되었어요. 어머니, 어떻게 하죠?”


나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선생님, 뭐 그런 걱정을 하세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광희 짝을 하면 되죠. 맨 뒤에서 할께요. 연습하는 날에 저도 뒤에서 같이 연습할게요. 미리 알려 주세요.”


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셨기는 했지만, 오히려 뒤에 말썽쟁이 몇 명을 내게 부탁하며 그렇게 하자고 해서 연습에도 함께 했다. 선생님은 오히려 고마워하셨다.


운동회 당일 꼭두각시 춤을 추는 차례가 다가왔다. 나도 아이들 색깔에 가까운 옷을 구해서 입었다. 좀 부끄러웠지만 나도 즐기기로 마음을 먹으니 내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옷매무새를 챙겨주고 있었다. 고무풍선으로 장식된 운동회장 입구를 광희와 함께 팔짱을 끼고 등장했다. 


꼭두각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데, 과일주머니를 들고 찾아가 만났던 다영이,  동찬이 엄마가 우리 모자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단상을 보라고 했다. 운동장 단상에 있는 교장 선생님과 손님들이 일어서서 우리를 보며 박수를 치시고 계셨다. 이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쳐다보던 엄마들의 마음도 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이 학교를 다니는 5년 동안 광희는 단 한 번도 활동에서 제외된 적이 없다. 그리고 내 아이를 위해 특별히 학교에 요구 할 일이 없이 다른 친구들과 다름없이 학교에 다녔다. 숙박을 하는 극기 훈련과 수학여행에서도 학교 측에서 알아서 필요인력을  배치해주는 등 능동적으로 움직여 주었고, 방과후 활동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었다. 광희의 초등학교 생활은 늘 소소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광희는 즐거운 쪽을 선택하였다. 나도 광희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리고 이해하려고 노력도 했다.


광희에게 큰 재산이라면 초등시절 친구들이다. 그 겨울  태권도장에서 만나 5년 동안 같은 반을 하겠다고 함께 한 친구 다영, 동찬, 혁재, 예나. 이제 각자 전문가의 길을 위해 애쓰고 있을 게다. 초등 6년이란 시간을 힘이, 중고등 학교에 어려움을 이겨내는 돼 버팀목이 되었다. 그리하여 광희는 이 친구들과 직장인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하고 싶은 소중한 꿈을 품게 되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넉넉한 사람들이 하는 일인 것 같다. 우리 옛 말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그렇다. 장애자녀를 키우는 우리 부모들이야말로 참으로 넉넉해질 수 없는 조건을 혹으로 달고 살고 있다. 늘 무언가 쫒기는 삶이 넉넉할 수 있는가?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고 다른 사람들보다 분명 투쟁하듯이 열심히 살고 있지만, 불안과 늘 팔짱을 낀 채 사는  현실이 넉넉할 수 없다. 


장애자녀를 양육하며 가족, 학교, 치료실 등에서 스트레스를 견디어 내며 사는 삶에 넉넉함이 자리잡기 어렵겠지만 이 글에서 나는 광희와 함께 겪은 경험을 통해 여유와 넉넉함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삶의 비결이었기 때문이다. 




최미란 / 장애청년엄마 / 흰돌종합사회복지관 사회성교실



* 이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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