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발달장애자녀의 자존감을 위한 탄생설화 꾸미기

정유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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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10:55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오빠의 태몽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여러 번 얘기했다. 커다란 흰 코끼리가 엄마를 향해서 달겨 드는데 엄마가 합장을 했더니 코끼리가 멈춰서 엄마한테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이다. 불교신자인 엄마에게 흰 코끼리 태몽을 꾸고 태어난 오빠는 그야말로 귀하디귀한 존재로 떠받들어졌다. 오빠는 자손이 귀한 집에 태어나 온갖 친척 어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위치인데 게다가 태몽까지 성스러운 흰 코끼리라니. 


남동생 역시 부처가 등장하는 태몽을 꾸었다면서 엄마는 두 아들의 태몽 얘기를 의기양양하게 되풀이하였다. 당연히 나는 내 태몽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는데 엄마는 딸의 태몽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꽃이었나? 뱀이었나? 태몽에 꽃이 나오면 딸이라던데.'' (우쒸!)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의 어느 날, 지환이가 뜬금없이 ''나는 어떻게 해서 태어났어요?'' 하고 질문하였다. 이런 질문을 하리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그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하지? 아기 탄생의 과정을 설명해 줘야 하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어쩌구 저쩌구? 엄마 뱃속에서 10달 동안 어쩌구 저쩌구? 지환이를 임신하고 태교를 위해 어쩌구 저쩌구? 이번 기회에 성교육도 제대로 시켜볼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환이에게 과학적인 아기탄생의 과정을 설명해도 알아듣고 이해하지 못할것 같았다. 성교육의 내용이 일부 포함될 수밖에 없는데 후유증(?)도 약간 우려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ADHD 치료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읽게 된 [리틀 몬스터]라는 책에서 아이의 자아 존중감을 키워주는 것이 부모로서 제일 중요하다는 내용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지환이 맞춤형 탄생설화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 아기가 태어나려면 삼신할머니가 도와줘야해. 삼신할머니가 집에 다니면서 아기를 데려다 주는거야. 삼신할머니가 엄마한테 지환이를 데려다줬어. 이 아이는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아기니까 열심히 잘 키워야 한다고 그러시던데?

-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된대요?

- 응! 잘 생각해 보렴. 아기를 키울 사람은 A아줌마도 있고 B아줌마도 있고 C아줌마도 있고 또 다른 아줌마도 많은데 왜 하필 엄마한테 데려다 줬을까?

- 엄마가 제일 잘 키울 거  같아서요.

- 그렇지! 엄마는 똑똑하지, 일도 잘하지, 대학생도 가르치지, 박사님이지, 친구도 많지, 돈도 많이 벌지.. 그래서 많고 많은 아줌마들 중에 바로 이 정병은 엄마한테 맡긴 거야.

- 그럼 엄마가 아기들 중에 나를 고른 거에요? 내가 제일 맘에 들어서?

- 아니아니, 아기는 고르는 게 아냐. 그냥 삼신할머니가 지환이를 엄마한테 맡기면서 잘 키우라고 신신당부했어.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그래서 엄마가 지환이를 잘 키우려고 엄청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거야.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탄생설화이지만 지환이의 빛나던 눈과 의기양양한 표정을 기억한다. 자신이 훌륭한 사람으로 클 것이라고 이미 삼신할머니한테 보증수표를 받았으니 자신감이 높아졌다. 학교 친구들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오는 날이면 탄생설화를 되풀이하면서 다독거려 주었다. ''짜식들, 지환이가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건데 그걸 몰라보고 까불고 있네.'' ''지환이가 멋있게 행동하려고 애쓰는데 그걸 모르네.'' ''아휴 정말 멋지게 행동했는걸? 나중에 삼신할머니한테 칭찬받겠어(으쓱으쓱)'' 그러면 지환이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고 행동을 조절하려고 애썼다.


특히 사춘기에 지환이의 부적절한 행동이 절정을 이룰 때 기싸움을 하거나 힘겨루기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탄생설화를 얘기하면 조금 수그러드는 효과도 있었다. ''엄마는 너를 잘 키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중에 삼신할머니가 오면 잘 키웠다는 칭찬을 듣고 싶다'' 몇 번을 그렇게 힘든 고비를 넘기고 지금은 진짜 훌륭한 성인으로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최근 지환이의 언행을 보면 이런 효자가 있나 싶고, 이런 순박한 행복한 청년이 있나 싶다. 비장애 청년들 중의 다수가 우울하고 불안하고 무기력하고 의욕이 부족하고 냉소적인데 말이다.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제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런저런 의견이 있을수 있지만 나는 아이의 자아존중감이 꺾이지 않도록 애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쓸모없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것이야말로 발달장애인들이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기초체력인것 같다. 


자아존중감을 향상시킨다고 해서 일부 몰지각한 부모들처럼 자기자식 기세우기 하라는 의미가 아닌 줄은 알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했으면 바로 잡아야 하고 야단칠 일이 있으면 야단쳐야 한다. 그러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인격적으로 모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중증장애라도 자신이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는지 아니면 무시당하는지 다 안다. 



정병은 사회학박사/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발달장애청년 엄마


* 이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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