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인식


혼자서는 끌 수 없는 발등의 불

김성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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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1 12:20



복지관에서 발달장애 손자를 둔 조부모를 위한 강의를 하고 난 뒤 얼마 후였다. 당시 내게 명함을 받아가셨던 할아버님과 부모상담을 하게 되었다. 외손자의 장애로 내게 상담받으러 오신 할아버님은 내게 물어볼 것들을 초등학생용 공책에 미리 적어 오셨다. 상담을 진행하는 내내 그 공책 앞표지에 할아버님이 직접 크게 써놓으신 손글씨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민재 사랑해"

(민재는 가명)


힘들어하는 딸아이를 위해 애비가 해 줄 게 뭐 있겠나 싶어 할머니랑 같이 그냥 아이 돌봐주고 나중에 유산이나 좀 남겨줄 생각만 하다가 내 강의를 듣고 생각이 바뀌셨다고, 아이를 위해 좀 더 정확한 정보도 얻고 배워야 겠다 싶어서 찾아오셨다고 말씀을 하셨다.


한창 말씀을 나누던 중에 다른 엄마들한테 ABA 치료라는 걸 들었는데 한달에 300만원까지 들여가며 치료를 받는다고 그게 어떤 거냐고 물으셨다. 답답했다. ABA는 별도의 치료 프로그램이 아니라, 치료사나 특수교사 또는 부모가 아이와 상호작용하며 무언가를 가르칠 때 적용할 수 있는 훈련 방식의 하나일 뿐이라고, 특수교육이나 발달장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기본 개념과 기법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개입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그런 치료를 꼭 따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할아버님은 손자를 위해 한의원에서 침도 맞혀 보고, 영양제도 먹여보고, 별의별 것을 다 해봤다고 말씀하시면서, 지금은 그게 다 사기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사실 이런 시행착오는 대다수의 발달장애 부모님들이나 가족들이 처음 진단후 수 년 동안 거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간과 비용이 허비된다. 그리고 그런 사기성이 분명한 정보들을 확산시키는 주체가 다름아닌 같은 부모님들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사기꾼들이 없어지는 것이 먼저겠지만, 늘 언제나 그런 인간들은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기에 먼저 부모 스스로 정확한 사실과 객관적인 정보를 알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데 아직 아이가 어릴 때는 장애를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고 그걸 어떻게든 고치겠다는 마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좋다는 건 이것저것 모조리 알아보고 모조리 적용해 보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공인된 재활치료(언어치료, 놀이치료 등)라 해도 그것은 사실, '치료'가 아니라 일대일의 집중적인 '교육' 또는 '훈련'인 것이고, 아이마다 모두 다른 발달특성때문에 그 효과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다가, 그 치료사들이 모두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기 저기 전문성 있는 의사와 치료사를 찾아 헤매는 시간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할아버님은 또 말씀하셨다. 정확한 정보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고, 정보가 너무 없다고, 부모들간에 떠도는 이야기 말고 전문가의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게 너무 어렵다고. 지난 번 내가 강의를 나갔던 그 복지관의 조부모 교육도 처음이고 다른 곳에서도 그런 교육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우리에게는 발달장애지원법도 좋고, 특수교육법도 좋고, 장애인복지법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마다, 부모들마다 그 상황과 요구에 맞춰,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계획을 세워서 어떻게 아이를 양육하고 성인기를 준비해야하는지 그 과정을 안내해 줄 구체적이고 상세하고 개별적인 가이드를 제공해 주는 곳, 그런 사람은 왜 이리도 부족한가. 


발달장애를 진단받은 아이의 부모님들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것을 혼자 끌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복지분야의 코디네이터든, 매니저든, 전문가 멘토든, 뭐든 간에 발달장애 부모들에겐 처음 진단받고 수 년간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를 매일 고민하며 수많은 중요한 결정을 해야하는 시기일텐데, 전문가도 아닌 젊은 부모들이 혼자서 어떻게 그 과정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많은 복지서비스와 사업들, 복지관, 그 많은 센터들과 단체들, 그많은 의사와 특수교사와 치료사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길래, 친한 엄마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 외에, 확실하고 정확하고 바른 정보를 얻기가 이리도 어려운 것인가. 오죽하면 어머님들이 직접 자조모임을 만들고 스스로 공부를 하며 정보를 나누는 것이 가장 유용하다고들 하시겠는가.


기관이 없어서, 의사가 없어서, 치료사가, 교사가, 복지사가 없어서 그게 안되는 게 아니다. 발달장애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가족과 당사자의 삶을 위해 필요한 구체적이고 쓸모있는 정보를 가지고 양육과 교육과정을 안내해 줄 정도의 전문성이 있는 인력이 부족한 거다. 동네마다 병원과 복지관과 특수교육지원센터와 치료실이 운영되고 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이런 전문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곳, 얻을 사람이 여전히 태부족한 것이 발달장애인 가족이 처한 현실이다.


어떤 제도든 정책이든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저 할아버님이 공책에 "민재야 사랑해"라는 글자를 꾹꾹 눌러 쓰실 때의 그 마음을 생각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역량이 갖춘 사람들이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함께 아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사람에 대한 투자, 그 사람의 발달장애에 관한  전문성에 대한 투자부터 다지는 게 우선인 것 같다. 


10여 년 간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라 답답하지만 전국 어느 지역에서든 이런 전문적인 서비스를 쉽게 만날 수 있게 될 때까지 나는 계속 외칠 것이다.


발등의 불은 당장 꺼야 한다. 그런데 혼자 끌 수 없는 발등의 불도 있다. 온몸에 불이 옮겨붙기 전에 우리가 함께 꺼야 하는 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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