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과 일
글 : 정병은 (사회학 박사/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운영위원)
얼마 전, 취업면접에 도전한지 4번 만에 지환이가 취준생에서 훈련생이 되었다. 비록 한시적 훈련생이지만.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 근처에 있는 장애인복지관 직업반에서 기초 직무직능 훈련을 받아 왔었는데, 이제는 현장에서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다. 훈련생 모집 공고에 소개된 직무는 슈퍼마켓에서 물품 검수와 진열, 매장 청소 등이라서 지환이에게 잘 맞을 것 같았다.
지환이는 집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모든 매장 직원과 알고 지낼 뿐만 아니라 영수증이 없는데도 환불이나 교환을 해 올 정도이다. 집에서는 쓰레기 버리기 담당이고, 화장실 청소도 곧잘 하니까 매장 청소쯤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환이에게 훈련생 모집 공고를 보여주며 직무를 설명해 주고,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별 망설임 없이 지원하겠다고 해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았다.
단정해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면접 장소에 갔더니 21살 된 앳된 발달장애청년도 와 있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보니 지환이보다 의사소통이나 상황 판단력이 좋아 보였다. 이번에도 또 탈락이겠거니 했는데, 면접 후 훈련생으로 선정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어리둥절하였다. 그 청년보다 더 나은 조건은 신체조건 뿐인데, 지환이가 무거운 물건도 번쩍번쩍 들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모양이다.
정식 고용도 아니고 몇 개월짜리 훈련생이 되었을 뿐인데 벅찬 감정이 올라왔다. 훈련생 선정 소식에 이렇게 호들갑이라니, 나중에 정식으로 채용이라도 되면 난리가 나겠구나 싶었다. 그만큼 발달장애인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이다. 이들은 취업은커녕 제대로 된 직업훈련조차 받기 힘들다. 비장애 청년들은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경험을 쌓기도 하고 직업훈련기관에서 자격과 기술을 연마하는데 발달장애청년들은 이런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취업면접만 하더라도 지환이는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했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과 공식적으로 면접을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3번이나 면접-탈락을 거듭하자 지환이는 아쉽고 속상한 감정을 표출하였다. 엄마인 나도 속이 쓰리고 아쉬운데 당사자는 얼마나 화가 날까 싶었다. 지환이가 낙담한 나머지 취업의지가 꺾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직장에 다녀야겠다는 의지는 고수하였다.
첫 번째 면접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 미처 직업의식이나 직능파악도 되지 않은 채 보게 되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쟁쟁한 인재들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하고, 채용과정이라도 경험시킨다는 차원에서 이력서를 냈다. 아무런 직업훈련 경력이 없어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서류 통과가 되어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면접대기실에서 50분 이상 차분히 기다리는 다른 발달장애청년들을 보고 지환이의 부족함만 깨닫고 돌아왔다.
두 번째 면접은 단독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면접 예상 질문을 뽑아서 며칠 동안 연습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연습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고용지원기관의 담당직원이 면접에 동행했는데, 첫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면접관에서 명함을 달라 하고, 질문 외에 불필요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정작 지환이는 질문에 대답을 잘 했다면서 합격이라고 여기저기 헛소문을 냈다. 면접관은 지환이의 충동적이고 불쑥불쑥 끼어드는 의사소통 방식, 불필요하게 많은 말을 부정적으로 보고 탈락시켰다. 자신에게는 괜찮지만 매장 손님들에게 그런 언행을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장애감수성이 없는 진상 고객이 올 수도 있으니 면접관의 우려가 이해되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의 별난 특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분위기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세 번째 면접은 3-4명이 단체 면접을 보았는데, 직무와 관련된 경험을 보여주는 사진도 준비해 갔다. 지난번 면접에서 지나치게 말이 많아 탈락했으니 면접관이 묻는 질문에만 대답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예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단독 면접 때와 달리 단체 면접이라 긴장을 많이 해서 얼어버린 듯하다. 너무 말이 많거나 너무 말이 없거나, 적당한 선을 찾는 게 이렇게나 어렵다니! 이번에도 합격될 것으로 믿었던 지환이는 연속된 탈락 소식에 상심이 커서 ‘나, 취업 안 할 거야!’라며 화를 냈다.
말로만 듣던 냉혹한 현실과 열악한 장애인 고용실태를 마주하니 고용한파를 겪는 비장애 청년들도 떠올랐다. 이력서와 자소서를 100개나 쓴다는데, 서류 통과되기도 힘들다는데, 어렵사리 면접을 봐도 취업이 어렵다는데. ‘지환아, 네가 아는 누구누구도 면접 보고 떨어지고 또 면접 보고 그런대...’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고 제대로 된 진로탐색, 취업준비를 하지 못하고 학교를 졸업한 지환이는 얼마나 더 연습하고 훈련해야 할까.
지환이의 3전 4기 면접 도전을 거치면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점은 1) 본격적으로 취업에 나서기 전에 다양한 직무와 직능을 쌓을 수 있는 현장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너무 치료와 학습에만 매달리다 보면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것 같다. 지역사회의 다양한 업체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해 보고 사람들과 부대낀다면 취업준비가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
2) 발달장애인을 고용하는 기준의 적정성이다. 당장 작업현장에 적응해서 일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은 소수에 그친다. 일주일 만에, 또는 한 달 만에 여러 직무를 익히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이 몇 명이나 될까. 부족함이 있어도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가성비를 너무 따지는 것은 아닌지?.
3)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인력의 전문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발달장애에 대한 이해가 깊고 풍부한 경력을 지닌 전문가풀(pool)은 언제 만들어지는지. 발달장애인 정책 중에서 이런 전문인력 양성에 쓰이는 예산은 얼마나 되는지?.
4) 다양한 직무개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이다. 어쩜 그렇게 훈련생 모집, 채용 공고가 단순노무직만 즐비한 것일까. 단순히 장애인의무고용비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도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로서 다른 주체들과 공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사회에 기여하지 않고 사회에 공헌하지 않고 이윤만 추구하는 기업이 오래 가는 기업, 존경받는 기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애가 있건 없건 청년들이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살려 일자리를 찾기 힘든 세상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청년들이 비정규직으로 소모품처럼 쓰이거나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파쇄기에 끼어 사망한 김모군, 구의역 전동문에 끼어 사망한 김모군은 모두 지환이와 동갑내기 장애, 비장애 청년들이다. 청년들에게 이런저런 경험을 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 당장의 기능보다 잠재력을 보고 평가하는 기업, 이런 걸 바라면 너무 지나친 공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