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과 사회성


발달장애청년의 달콤쌉싸름한 사랑

정병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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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04:43

최근 지환이네 학교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에 “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있었다. 지환이는 “어떤 여자랑 살면 잘 먹고 잘 사나”라고 적어 넣었다. 22살 청춘의 생각이 기가 막혀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여자든 남자든 진짜 중요한 고민인데 현명하다’, ‘인생에 아주 중요하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잘 짚어냈다’, ‘핵심을 찔렀다’ ‘세상사는 걸 안다’ 등의 열띤 반응이 올라왔다. 1년전 동일한 질문에 대해서도 지환이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라고 답한 바 있다. 삶에 대한 태도가 아주 초지일관, 일편단심이다.

 

돌이켜 기억을 떠올려보니 지환이는 어렸을때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그것도 예쁜 여자를 좋아했다. 6살 유치원 시절 맘에 드는 여자아이를 졸졸졸 따라다닌다고 들었다. 선생님께서 누군지 알려줘서 살펴봤더니 긴머리에 초롱초롱한 큰 눈을 가진 예쁜 아이였다. 내심 흐믓해 하면서 ‘짜식, 보는 눈은 있구나’ 싶었다.

 

이후에도 지환이는 여자하고만 상호작용을 하고 남자한테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분명히 안면이 있고 친분도 있는데도 남자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남자에게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으니 기억에 남았을 리 만무하다. 반면 여자는 한번 만나도 이름을 기억하고, 몇 마디 나누었던 대화 내용도 떠올렸다. 한마디로 성별에 따른 선택적 인지, 차별적 기억이라고 할까. 그래서 나는 ‘사회학자의 아들이 성차별을 한다’는 농담으로 민망함을 처리하였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 또래관계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또래 남학생과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다. 욕설은 기본이고, 가방을 발로 차고, 심지어 때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지환이도 당하고 있지만 않고 몇 번 맞서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거칠지 않은 여자에게만 관심을 갖는 성향이 깊어갔다. 덩치는 점점 커지는데 남학생과는 어울리지 않고, 여학생에게만 놀았다. 여학생하고만 논다고 남학생들로부터 놀림을 받기도 하였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엉망진창으로 보내고, 정서 함양을 위해 악기연주를 배우러 (사)몸짓과소리라는 예술단체에 가입하였다. 그 단체는 발달장애 아동/청소년에게 악기레슨을 시켜주는데 매년 음악캠프를 열었다. 그 음악캠프에서 지환이는 최초의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지환이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문자 한 통을 보내고 감감무소식이었다. 나중에 카톡으로 전송된 활동사진을 보니 그녀와의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얼굴에 뚝뚝 묻어나왔다.

 

이듬해 같은 캠프에서 ‘그녀’와 재회한 지환이는 캠프 내내 그녀와 붙어 다녔다. 나는 일이 너무 바빠서 지환이만 먼저 보내고 하루 늦게 합류했더니, 둘은 벌써 공식 커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지환이엄마라는 걸 알고서 커피를 타주겠다는 호의를 보였다. 그녀가 타 준 커피를 마신 후, 지환이한테는 그녀가 인사성도 밝고 커피도 잘 탄다고 칭찬했다. 그랬더니 헤벌쭉 웃으면서 “엄마의 며느리감으로 마음에 들어요?”라고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고 하는 걸 좀 더 봐야겠다”고 했더니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동안 그녀를 위해 클라리넷 연주 실력을 갈고닦은 지환이는 캠프 음악회 무대에서 그만 삑사리를 내고 말았다. 자신의 실수가 몹시도 안타까웠던 지환이는 안절부절하였다. 그러더니 저녁식사로 마련된 바베큐 파티장에 클라리넷을 챙겨가서 그녀만을 위해 세레나데를 들려주었다. 잘했다는 그녀의 칭찬을 듣고나서 지환이는 뿌듯하고 의기양양하였다. 캠프 내내 붙어다니면서 그녀를 챙겨주더니 급기야 그녀로부터 결혼하겠다는 말을 듣고 흥분상태에 빠졌다. 어찌나 기뻐했는지 목소리가 너무 커지면서 조절이 안될 정도였다.


 




그 이후 지환이는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거나 카톡을 주고받았다.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중간중간 멘트 코치를 해줬다. 그러나 상대방이 듣거나 말거나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건 여전하였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그녀 역시 아직은 많은 연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전화통화를 마친 지환이의 얼굴 표정은 하늘로 날아올라 갈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지환이가 아닌 다른 남학생에 관심이 있었다. 지환이와 통화하면서 그 남학생이 어디 있냐고 되풀이 해서 물었다. 눈치 없는 지환이는 이런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녀는 밝고 쾌활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어서 다른 남학생들한테도 인기가 많았다. 남학생들은 우르르 몰려가서 그녀와 놀았는데, 남학생과는 놀 줄 몰랐던 지환이는 주춤하였다.

 

다음해에도 여름음악캠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를 콕 짚어 버스에 같이 앉고 싶다고 하였다. 그녀에게 직접 말해서 허락을 받으라고 했더니 다른 참가자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오랫만에 재회해서 그런지 너무 기뻐서 그런지 지환이는 수줍어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이미 지환이의 가슴은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그녀에게 말을 붙이려고 순간 어떤 남학생이 그녀에게 저벅저벅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어어어어 하면서 어찌할 바 몰랐던 지환이는 나를 쳐다보면서 도움 요청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그녀는 인기가 많다. 엄마한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네가 적극적으로 말을 걸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소심한 지환이는 부끄럽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 이후 그녀는 지환이가 아닌 다른 남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환이는 캠프활동을 하면서도 연신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리곤 하였다. 다른 여학생과 놀라고 조언하였으나 못내 아쉬워하는 지환이의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변심에 상처받은 지환이는 캠프활동에 집중을 못하고 그녀 얘기만 뒤풀이 하였다. 보다못한 내가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좋아했던 사람이 안좋아질 수도 있어”, “다른 여학생하고도 친해보렴” 등의 조언(?)을 하였다.

 

캠프를 마치고 귀가한 지환이는 ‘이제부터는 그녀를 만나도 모르는 척 하겠다’, ‘그녀에게 관심없다’, ‘다른 여학생과 친하게 지내겠다’ 등의 말을 이어갔다. 반쯤은 진심인 것 같고, 반쯤은 실연(?)의 쓰라린 상처 때문에 내밷는 말로도 들렸다. 사랑은 나만 좋아하면 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나를 좋아해 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약간은 깨달은 것 같다.

 

지환이는 첫 번째 그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거두고 이제는 학교의 어린 여학생을 두 번째 그녀로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혼자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서로 좋아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6살이나 어린데?” “중딩 밖에 안되는데?” “뭘 보고 그 여학생이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등의 질문을 하였다. 그녀의 일기장에 ‘학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빠’에 자신의 이름이 써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무래도 의구심이 들어서 학교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다른 오빠와 달리 지환이 오빠는 과하게 장난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학교오빠로서 좋아하는 건 맞다.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대”, 이 말을 전하지는 못했다. 실망할까봐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대신에 나이가 어린 점을 들어서 학교오빠로서 좋아하는 거라고 못박아두었다. 지환이는 계속 일기장 얘기를 하면서 자기를 좋아한다고 우겼다. 그러면서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래, 그렇게 친절하게 굴면 나중에는 정말 너의 진심을 알아줄 거야. TV광고에서 봤던 것처럼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오빠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지환이의 일방적인 첫 번째 짝사랑은 아쉽게 끝나고 새로운 (짝)사랑이 계속 되고 있다. 내년이면 학교를 졸업하는데 어떻게 끝맺을지 모르겠다. 그녀를 두고 갈 수 없으니 졸업 후 그 학교의 직업대학 프로그램에 다니겠다고 한다. 원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프로그램인데 어쩜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노랫말처럼 사랑에 빠진 지환이는 멋진 오빠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환이의 사랑은 서투르고 어설프다. 그러나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설레고 아름답다.

 

부모들은 발달장애자녀의 이성교제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환이의 어설픈 (짝)사랑을 막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통한 성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나를 좋아해야 되고, 서로 좋아하려면 코드가 맞아야 한다. 그러니 나와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발달장애인에게 부족한 사회성은 관계맺음을 통해서 비로소 실질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

 

아들 가진 엄마라서 그런지, 지환이가 한 여성에게 순정을 바치기보다 많은 여성들과 교제해 보면 좋겠다. 단 한 번에 한 명씩, 양다리는 안된다. 지환이의 고민대로 언젠가는 정말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결혼하고 싶어하니 지환이랑 잘 맞는 짝을 만나서 알콩달통 살면 좋겠다. 그러고보니 이런 희망은 여느 청년의 엄마도 똑같이 품는 희망 아닌가? 요즘 청년들은 ‘3포 세대’라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데 말이다.


정병은 / 사회학 박사 /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 발달장애청년 엄마


* 이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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