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과 일


자립의 현실과 미래(2) - 지역사회 기반의 사람중심계획



자립의 현실과 미래 (2) -지역사회 기반의 사람중심계획


김석주(자폐청년의 부모/ 음악치료사/ 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교육위원)


1. 사람 중심 계획 (PCP: Person Centered Planning)

탈시설 자립지원은 ‘사람중심계획(PCP: Person Centered Planning)’을 기반으로 수립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1980년대 미국과 캐나다 복지 연구자들 중심으로 제안된 모토인데,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로 보편화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기관에서 사전 수립된 서비스를 이용자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용자 개개인의 욕구와 필요를 직접 소통하여 복지기관과 지역사회, 교육과 의료, 모든 영역이 동등한 협력적 위치에서 함께 계획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복지철학입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장애인을 계획 과정에 중심에 두고 당사자 욕구에 따라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가족, 친구, 서비스 제공자 등은 계획 과정에서 파트너로 참여해야 된다.’
그러니까 보호자나 종사자가 결정권자의 위치가 아니라 파트너나 의사소통의 조력자로 참여해야 되는 것입니다.
‘장애인에게 지금과 미래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충분히 파악해야 된다.’‘지원은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통합되는 데 유용하도록 한다.’
즉 장애인이 현재 거주하는 지역사회의 네트워크와 자원들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장애인이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원들을 연결하고, 지속적으로 모니터하여 점검하고 보완하는 과정까지 다 포함해서 계획을 짜야 하는 것이죠.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개별화교육계획(IEP: Individualized Education Plan)을 적용하지만 실제로는 특수교사와 보호자만 주로 참여하고 그 외 관련된 주변인이나 기관의 참여는 저조합니다. 그리고 2016년 발달장애인지원법의 제정으로 각 시도에 설치된 발달장애인지원센터에서는 발달장애인의 개인별 지원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중점 사업인데, 제가 사는 부산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약 1만 4천여명의 발달장애인이 있는데, 발달장애인지원센터에서는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1년에 100여명 정도의 계획만을 수립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획 수립에만 140년이 걸린다면, 실행은 언제 할까요? 제 아들도 개인별지원계획을 작성해 보았는데, 장애당사자인 아들과 부모, 그리고 아들이 다니는 복지관 직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의 과정이나 내용이 막연해보이더군요. ‘장애인이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지원한다.’라는 한 가지 기준만 가지고 “원하는 것이 뭡니까?”라고 시작부터 물으면 굉장히 막연하지요.

현재의 체계 안에서 가능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예시도 없이, 개인이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들을 상상해서 말하라 하면 누가 제대로 답할 수 있을까요? 정확하게 질문해야 정확한 답이 나옵니다. 구체적이지 않은 질문에는 막연한 답이 나올 수 밖에 없고, 계획의 도구가 엉성하면 실행의 효과도 모호해지지요. 미국과 캐나다에서 사람 중심 계획(PCP) 모토가 제안된 것은 1980년대인데, 30~40년이나 지난 현재 우리나라는 아직도 초기 단계인 것 같습니다.

2. 지역사회중심재활 (WHO-CBR: Community Based Rehabilitation)

발달장애인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요?”라고 질문할 때, 아래 WHO의 지역사회중심재활(CBR: Community Based Rehabilitation) 범주로 개인별지원계획의 기본틀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지역사회에서 살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자원망은 필요한 거지요. 큰 범주는 보건, 교육, 생계 그리고 사회활동, 임파워먼트의 다섯 가지로 구성되는데, 임파워먼트는 ‘당사자에게 권한을 부여한다, 당사자의 역량을 강화한다’는 뜻으로 보시면 됩니다. 각 범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의 현재 구축 정도와 미래의 방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표: WHO-CBR: Community Based Rehabilitation)


첫째, ‘보건’은 사회 구성원의 건강 증진을 위한 의료 정책 전반을 포함합니다. 물, 공기 등의 환경오염을 예방하는 정책 그리고 의료적인 지원에 있어서 진단사정처치 등의 체계들, 재활을 위한 교육, 치료, 보조기구 등 수단적인 지원들까지 포함합니다.

둘째, ‘교육’은 학교 차원 뿐 아니라 조기 보육과 전 생애주기에 따른 가정에서의 지원까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나마 우리나라의 경우 고등부까지는 의무 교육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은 출생 시부터 가족의 심리, 물리적인 환경, 경제적인 문제까지 초기 교육의 영역으로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안학교나 홈스쿨링 등 비정규 교육도 포함됩니다. 실제로 많은 발달장애인의 부모님들이 공교육의 불안을 대안교육으로 희망하고 있는데, 전문적인 인력이나 자원들도 빈약하고, 설립된 대안학교의 효과성 검증도 부족하여 많은 부분에서 부모들에게 선택과 책임이 맡겨져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방과 후 교실이나 지역아동센터, 최근 보건복지부 제도로 시행된 청소년 방과 후 활동서비스도 교육적 지원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게 성인기 이후 평생교육도 포함되는데요. 복지부 지원의 주간활동서비스가 여가와 돌봄 위주라고 한다면, 평생교육은 교육부에서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교육적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평생교육의 본래 취지와 목적에 맞으려면, 기존에 비장애인들 위주로 운영되는 지역대학이나 주민센터, 백화점, 마트 등의 평생교육원에서 발달장애인 대상의 특화된 강의를 개설하는 게 바람직한데요. 서울에서는 22개 구마다 별도의 발달장애인 평생교육센터가 설립되었고, 특수학교의 연장처럼 기관마다 20~30여명의 발달장애인만이 몇 년간 이용한 후 원생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 사회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들이 각자 원하는 취미나 자격증 취득 등을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과정과 자원들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역할로서의 평생교육센터 본 취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당장 시급한 최중도발달장애인들의 이용 욕구와 장기적인 평생교육 환경의 개선 사이에서 함께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셋째, ‘생계’ 부분은 직장 고용을 통한 급여나 재정 서비스입니다. 장애인이 적금을 할 때 10만원 넣으면 원 플러스 원으로 20만원을 적립해주는 지역 사례들, 그리고 부양의무제 폐지 이후 성인기 장애인의 생계비를 지원하는 등의 정책 등이 해당됩니다.

넷째, ‘사회활동’으로는 활동지원서비스 제도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2008년부터 시행된 활동지원서비스 때문에 낮시간에 아들을 맡기고 저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으니 큰 도움이 된 셈이지요. 그리고 장애인의 결혼, 주거자립를 위한 자립지원인, 직장생활을 위한 근로지원인 제도 등도 포함됩니다. 문화와 예술 활동면에서는 예전엔 발달장애인이 관람객으로 공연장에 입장하는 것조차 어려웠는데, 이제는 공연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고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법적인 면에서는 발달장애인이 피해자나 가해자 상황에 처했을 때, 의사소통을 지원하는 조력자, 담당 경찰, 담당 변호사 등의 체계가 밑그림 정도만 실행되고 있습니다. 경찰서나 법정에 지정된 담당자들도 발달장애 특성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부족해서, 실제 사건이 발생되면 여전히 해결이 어렵습니다. 현재는 발달장애인지원센터의 권리구제팀과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면 그나마 장애인 편에서 중재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임파워먼트’는 장애인 당사자의 권리와 역량을 강화하는 것인데, 의사소통 지원 방안이 먼저 해결되어야 하겠습니다. 발달장애인의 개인별지원계획 수립 시 “원하는 것을 해드릴게요.”라고 물을 때, 구두나 문자로 언어표현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의 욕구와 필요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부터가 난관이지요. 단지 그림이나 어플리케이션 등의 도구적 지원을 넘어, 발달장애인의 평소 눈빛이나 제스춰, 특정 소리나 행동을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주변인들이 있어야 하고, 개인별 의사소통 방식을 데이터로 축적하고 AI앱 등으로 타인과 쉽게 공유 활용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예를 들면 지역사회의 미장원, 마트, 식당 등 주변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소통방식을 공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 참여 면에서는 단지 선거권, 투표권 뿐만 아니라 현재 UN에 발달장애인이 위원으로 선정되어 있는 것처럼 적극적인 주체로 참여하는 것까지 인식해야 합니다. 특별한 몇 명의 발달장애인 뿐 아니라 어느 지역 어느 기관에서나 자조 집단 및 당사자 조직까지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지만, 발달장애인이 탈시설해서 지역사회로 나갔을 때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연결망이 됩니다.

위의 PCP와 CBR을 우리나라에서 실제화하기는 아직 길이 멉니다. 그러나 지역사회 자원을 기반으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지원하는 사람중심의 계획으로 충분한 예산과 체계가 병행되어야만, 발달장애인의 자립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에 사회적 인식과 공론화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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