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과 일


자립의 현실과 미래(3) - 헤어질 결심을 위해 필요한 것




자립의 현실과 미래(3) -헤어질 결심을 위해 필요한 것


김석주(자폐청년의 부모/ 음악치료사/ 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교육위원)



영화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탕웨이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깊이 파고 그 안으로 들어가 밀물 속으로 사라집니다. 파도가 치면서 모래와 물이 멀리 씻겨 나가고, 결국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지요. 헤어졌지만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으로 남은 겁니다. 발달장애인 부모의 자녀와의 ‘헤어질 결심’도 사랑입니다. 네, 영원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1. 목표: 24시간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발달장애인의 부모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부모 없이도 자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24시간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이지요. 하루 24시간을 나누어 보면 크게 직업, 교육과 여가, 주거생활로 구성됩니다. 각 영역의 현재 실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직업 영역에는 보호작업장, 표준사업장, 일반 고용의 형태가 있고, 직장 내 근로지원인 제도가 있어서 보호자 대신에 의사소통과 이동 등의 조력을 합니다. 둘째, 교육과 여가 영역에는 평생교육기관과 여러 단기 프로그램 그리고 주간보호센터와 주간활동서비스 등의 기관이 있고, 평생교육사, 복지사, 활동지원인 등이 조력을 합니다. 셋째, 주거 영역으로는 서울시의 경우 발달장애인 지원주택 사업으로 탈시설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고 있고, 타 지역은 그룹홈이나 거주시설이 대부분입니다. 발달장애인이 독거든 동거든 원하는대로 선택하여 주택을 소유하고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으려면, 새로운 조력 형태로 ‘자립지원인’ 제도가 필요한 시점이겠습니다. 예전으로 치면 시설의 생활지도자와 같은 역할이 되겠지요. 이렇게 직장에서는 근로지원인, 교육과 여가현장에서는 활동지원인, 주거생활에서는 자립지원인이 24시간 바통 터치로 연결되면, 그때는 부모가 없어도 하루를 지낼 수 있겠지요.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사회에 선뜻 맡기지 못하는 것은 제도도 미비하지만, 지원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믿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도 자녀를 온전히 품지 못하고 충돌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인이 자녀를 제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리라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음악치료사로서 거주시설의 장애인과 종사자들을 만나왔는데, 평범한 부모들보다 더 세심히 돌보고 존중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부모들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장애자녀를 낳고 혼란 속에서 양육의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복지사나 특수교사 등 종사자들은 지식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 면에서 준비된 상태로 장애인들을 만납니다. 그렇기에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냉철하게 인내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와 종사자 양측 입장을 경험하면서 오히려 세상이 믿을만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성이나 자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적지원이 시스템화되어야만 안전할 것입니다. 근로지원인이나 활동지원인 한 명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장애인의 정보를 공유하고, 또 현장의 어려움을 즉시 해결해줄 수 있는 팀체계로 상호 모니터하고 협력하는 24시간 인력 지원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2. 현실: 동상이몽, 각자도생


이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어려울까요? 장애인이나 보호자나 종사자들이나 미래의 바람은 똑같이 ‘발달장애인 24시간 국가책임제’인데, 그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주장과 표현을 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이는 ‘동상이몽’과 ‘각자도생’, 심지어 ‘각개전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현실은 왜 이럴까요? “지원 주택이 뭐예요?”

“주간활동서비스가 뭐예요?”“장애인 연금과 주거급여는 누가 주는 건데요?”

서울과 수도권 외 지방에서는 특수학교 학부모 활동도 하고 또 장애인단체 활동도 하는 적극적인 부모님들도 이런 질문들을 하십니다.


어떤 정책과 제도가 있는지, 내가 받지 못하고 있는 혜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제대로 주장을 할 건데,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필요와 요구를 정확히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각자도생’, ‘각개전투’로 나뉘어진 힘겨움은, 지역마다 가정마다 경험과 정보의 큰 편차가 주된 요인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그나마 의무 교육이라서 학교를 통해서 모든 정보가 골고루 공정하게 가정에 돌아갑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각자도생의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한부모, 맞벌이, 조부모, 다장애, 생활수급의 가정들은 특히나 사각지대인데 그 비율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입니다.

각 가정의 형편 뿐 아니라, 지역별 편차도 매우 큽니다. 서울에서는 발달장애인지원주택이 몇 년 전부터 시행되었고, 또 도전적행동을 가진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챌린지2 사업도 하고, 각 구마다 발달장애인 평생교육센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2의 도시인 부산조차 발달장애인평생교육센터도 거의 없고, 챌린지2 사업의 명칭조차 들어보지 못한 부모님들이 대부분입니다. 지원주택사업도 마찬가지고요. 성인기 낮활동을 위한 주간활동서비스도 지역별로 확대되고 있긴 하지만 서울, 부산, 창원 몇 개 도시 외에는 지자체 예산 비중이 크기 때문에, 타지역 보급이 더딥니다.


이와 같이 각 가정 및 지역별 편차로 각자의 경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같은 질문에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헤어질 결심’을 부모에게 권하기 전에, 그룹이나 개인별 자립 지원을 받아본 경험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걸 먼저 인지해야 합니다. 경험이 다른 대상에게 ‘성인기 자녀의 자립 형태는 어떤 게 좋을까요?’라는 질문은, 탈시설 대 탈가정으로 싸움을 부추기는 결과 밖에 안 되지요.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 이름을 대며 선택하라고 하면 질문이 잘못된 것이지요. 짜장하고 짬뽕 밖에 안 먹어봤는데 ‘탕수육 먹을래 양장피 먹을래?’라는 질문은 사람 놀리는 겁니다.


3. 원인: 정보의 편차


동상이몽, 각자도생의 현실을 타계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사각지대까지 모두에게 정확한 정보전달을 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들을 사례로 들어보겠습니다. 20살이 되었을 때 주민센터에서 장애인연금 신청 통지문이 우편으로 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신청 가능한 소득수준이 적혀있었고, 제 아들은 동거하는 부모의 소득 때문에 해당이 안되는 걸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간 신청을 안했습니다. 음악치료사로서 복지 관련 일을 하는 저도 제대로 아들의 권리를 챙겨주지 못한 것이지요.


만약 통지문 내용 중에 ‘동거하는 부모의 소득과는 무관하다’라거나 ‘별도의 기준을 따른다’라는 문장이 있었다면, 그리고 덩그러니 우편물만 주지 않고, 전화나 방문으로 신청안내를 해주었더라면 연금을 놓치지 않았겠지요. 주는 연금을 일부러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해력이 있는 부모도 이렇게 연금을 놓쳐버렸는데, 장애인의 가족 중에 글을 읽지 못하거나, 우편물을 챙겨보지 않는 수많은 경우들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제 아들은 23살 때 연금신청을 했고, 그 이전 3년의 놓쳐버린 연금은 소급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지서비스는 ‘신청 우선주의’이기 때문에 당연한 권리와 혜택도 정부 직권으로 자동서비스가 되지 않습니다. 달랑 우편통지문 한 장으로 수많은 혜택이 공중에 사라져버리는 현실입니다.


장애인 지원의 궁극적인 목표인,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이와 사는 것, 필요한만큼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위한 첫단계는 공평한 정보전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현재 복지부에서는 ’행복E음’이라는 사회보장 정보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국의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정보가 전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서비스 전달을 위한 시스템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신청의 중복자는 없는지 그걸 솎아내는 데에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솎아내기 이전에 사각지대까지 정보를 전달하고 서비스 신청이 누락된 곳은 없는지부터 찾아야할 것인데 말입니다. 이런 시스템 구축이 어려워 보이진 않습니다. 최근 판데믹 때 질병관리본부에서 전 국민의 코로나 감염여부를 체크하고 하루에도 수십 건씩 문자가 오던데, 이런 시대에 기술이나 인력, 예산이 없어서 못한다고는 볼 수 없지요. 단지 인식을 안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4. 시작: 자립지원 체험부터


부모가 자녀와 ‘헤어질 결심’을 하려면 보고 듣는 정보 뿐 아니라, 직접 맛보고 느끼는 장애인 자립 지원의 체험이 먼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다시 강조하고자 합니다.

“사회를 믿고, 사람을 믿고 일단 그냥 맡겨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언어 남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립생활지원센터 또는 현재의 거주시설, 복지관 등의 기관과 연계하여 주말캠프부터 시작하여 장단기의 숙식 자립 체험 등의 다양한 사업들을 개발해서, 보다 많은 장애인가족들에게 경험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내 자녀가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을 받으면 부모를 떠나 자립이 가능하겠다는 구체적인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와 더불어 부양의무제가 완전 폐지로 의료비, 생계비, 교육비, 주거비 등의 최저 생계가 보장되어야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24시간 인력지원시스템으로 상호간 모니터와 협력, 위급 시 즉각 컨트롤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지원센터 중심의 개인별지원계획과 실행관리가 근간으로 작동되어야 합니다.

50대인 저는 20대 후반의 제 아들이 지금처럼 복지관에서 낮에 운동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요리하고 미용관리도 배우면서, 미래에 독거나 동거인을 스스로 선택하여 주택을 계약하고 원하는 곳으로 이사할 수 있고, 가사와 경제적, 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때는 기꺼이 헤어질 것입니다. 멀리 떠나도 영원한 사랑으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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