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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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몫 하는 발달장애인




정병은 (사회학 박사/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누구나 제구실을 해야 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책임을 지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제구실을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좁게는 가족 안에서 부모는 구성원의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을 담당하고, 자녀를 신체적, 정서적으로 양육한다. 자녀는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성장하고 사회적 존재가 된다.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으로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배운다. 직장에서는 피고용인은 조직의 요구에 따라 주어진 일을 하고, 자영업자는 상황에 따른 판단에 근거하여 일할 것이다. 이외에도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소비자로서, 유권자로서, 납세자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제구실을 하고 있다.


발달장애인도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고유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생애주기, 장애 정도나 유형에 따라서 구체적인 양태는 다르겠지만 발달장애인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려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제구실을 해야 한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이 뭔가 제구실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구실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장애에 갇혀서 무능력하다고 예단해 버리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능숙하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차츰 익히게 되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은 제구실을 하기까지 비장애인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뿐이다. 그러면 비장애인은 다들 그렇게 각자 제구실을 잘 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제구실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환이를 낳고 난생 처음으로 엄마가 되었는데, 적성에도 맞지 않는 엄마 구실을 하느라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 겨우 부끄럽지 않은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어린 지환이가 깊은 인내심과 넓은 아량으로 엄마의 부족함을 눈감아 주고 제대로 할 때까지 기다려 준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발달장애인이 제구실을 하려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발달장애인이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은 가족 내 역할일 것이다. 가족은 발달장애인과 가장 가까운 관계이고,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통한 1차 사회화는 발달장애인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가 되는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발달장애인은 아동기,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가족 내에서 제구실을 하고 있는가? 아마도 부모는 장애와의 전쟁을 치루거나 아니면 항복해 버려서 장애자녀가 가족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책임을 다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각종 치료실과 센터와 복지관으로 가득 찬 일정 때문에 가족구성원으로서의 할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쉽다. 그런데 가족구성원으로서의 할 일은 어렸을 때부터 하지 않으면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가족구성원으로서의 할 일과 책임이란 가족이 함께 일상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일을 말한다. 생존을 위한 소득활동, 정서적 교류와 공감, 다양한 집안일(가사), 생필품 구매, 교육과 돌봄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집안일은 발달장애자녀에게도 예외없이 분담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연령과 흥미, 장애 정도에 따라서 분담할 수 있는 집안일의 종류와 수준은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발달장애 때문에 못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집안일에서 계속 배제시킨다면 성인기의 자립생활은 어떻게 가능할까?


최근에 주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발달장애인의 자립준비 사례를 보면, 주거코치에 의한 설거지, 생필품 구매, 분리수거 같은 일상생활 지원이 포함되어 있다. 발달장애인의 자립준비를 뭔가 거창한 것으로 상상했었는데, 중년여성이 성인 남성 발달장애인들에게 설거지, 분리수거 같은 살림살이의 기본을 코칭한다고 해서 다소 어리둥절하였다. 성인이 되어서야 집안일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동기, 청소년기에 걸쳐서 집안일에 익숙해져 있다면 자립준비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런데 왜 발달장애인은 기본적인 집안일도 코칭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을까?

첫째는 집안일은 자고로 여성이 하는 일이라는 성별 역할 분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의 거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남성도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둘째는 발달장애자녀에게 무엇인가를 하게 하였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곤란한 결과 또는 난감한 상황 때문이다. 설거지를 했는데 깔끔하지 않아서 다시 해야 하거나, 음식을 흘려서 오히려 청소거리를 더 만들어 놓는다면 ‘너를 시키느니 그냥 내가 하고 말지’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잘 하는 경우는 드물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잘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지환이는 초등 2학년 때부터 간단한 집안일을 조금씩 돕기 시작했는데, 설거지를 하면 싱크대 주변을 물바다를 만들거나, 설거지한 그릇에 고춧가루가 남아 있어서 다시 해야만 했다. 그래도 계속 설거지를 하다 보니 지금은 완전히 맡길 수 있는 정도로 발전하였다. 설거지 외에도 다양한 집안일을 하면서 어엿한 살림남으로 크고 있으니 10년 후에는 자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사진 설명: 초등 2학년부터 설거지를 시작해서, 여행 중에도 설거지 당번을 하고, 지금은 아예 설거지를 믿고 맡긴다. 덕분에 엄마는 점점 편해지고 있다)


셋째는 발달장애인이 가족 안에서 제구실을 하도록 대접해 주는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가족구성원들이 발달장애를 가진 자녀, 형제자매, 손자녀에게 작은 역할이라도 인정하고 대접해 주지 않는다면 발달장애인이 해야 할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말하는데, 사람이 어떤 자리(역할)에 있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도 맡기고 시행착오를 허용하고 북돋아준다면 발달장애인도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책임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발달장애인은 일방적인 보호의 대상이거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역할이라도 기회를 주고, 인내를 갖고 기다리면서 성장해 나간다. 무능하다고, 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제껴 버릴 것이 아니라 제대로 대접해 주어야 제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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