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생애주기별 장애인가족지원 제안(2)
- 부제: 죽지 않고, 죽이지 않는 -
글쓴이: 김석주(자폐청년의 부모/ 음악치료사/ 칼럼니스트)
장애등급제를 폐지한 이유는 장애등급 1, 2, 3급에 따라 똑같은 서비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1급이라도 필요 없는 서비스가 있고 3급이라도 꼭 필요한 서비스가 있는 현실에서, 기관이나 가족의 의견이 아닌 장애 당사자의 필요와 욕구 중심으로 지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지역사회 기반의 사람 중심 계획을 말합니다. 외딴 시골, 공기 좋고 물 좋은 그림같은 건물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바로 이 곳에서 마트에 가고 영화관에 가고 병원을 다니고 미용실을 선택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정은 어떠할까요?
1. 죽지 않고, 죽이지 않으려면
예산 없는 법률과 제도는 그림의 떡입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복지 예산이 최하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간혹 복지 현장에서 이쪽 장애인 예산 빼앗아 저쪽 장애인 예산으로 넣는다며 약자들끼리 싸움 붙이는 이간질이 도는데, 복지예산 파이는 절대적인 한정치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복지예산 파이 자체가 적습니다.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 개인예산제 수립 등 이름만 난무하고, 실제로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두 함께 뭉쳐서 파이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죽지 않고, 죽이지 않고,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지원하는 복지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이미 OECD 상위권입니다. 그런데도 발달장애 가족의 동반 자살이 코로나 시기 동안 두 달마다 한 번씩 일어났어요. 이들은 왜 죽었을까요? 개인의 특수성이나 취약성으로만 보면 안됩니다. 발달장애인의 어려움은 당사자 개인을 넘어 가족 전체의 심리적, 경제적 어려움이 필연적으로 동반되기 때문에, 가족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장애자녀의 책임을 부모 개인에게만 일임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 아이를 데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라는 마음으로 막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는 건,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입니다.
2. 무엇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까?
발달장애인과 가족 대상 실태 조사들은 서울시 은평구 등 각 기초 지차제에서 실시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애주기별 또는 장애유형별로 필요한 욕구들의 구체적인 조사는 초기단계입니다. 한 예로 제가 자문으로 참여했던 ‘부산시 발달장애인 실태조사 및 지원 기본계획 수립’(2020, 부산시복지개발원)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자료에서 나타난 특이점은 부모의 연령에 따라서 욕구와 필요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20대 미만의 발달장애인들은 대개 만4~5세에 장애진단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20대 이상 청장년기 발달장애인들은 장애진단 시기가 평균 20세 때였습니다. 윗세대 부모들의 장애에 대한 이해부족이나, 장애진단을 사회적 낙인으로 여기는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이지요. 그리고 자녀를 자립시킬 의향에 대해 물어봤을 때, 50세 이상의 보호자들은 성인기 자녀를 자립시킬 의향이 적었어요. 부모의 노화와 사후가 실질적으로 염려스런 시기인데도, 자녀를 사회에 맡길 믿음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49세 이하의 젊은 부모들은 자녀를 자립시킬 의향이 아주 높았습니다. 미래에는 자립지원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나타낸 것이지요. 세대에 따른 경험과 정보의 차이가 이렇게 컸습니다.
세대를 통틀어 공통적인 필요는 ‘부모의 소득 보장’이었습니다. 부부 중 한 명은 자녀의 양육을 위해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는데다, 치료비와 교육비가 많이 들어 빚지지 않은 집이 없으니 가정에 소득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애자녀를 양육함과 동시에 생계비가 부족해지는 현실을 정부는 인지해야 합니다. 자녀의 도전적행동으로 인해 활동지원인이 매칭되지 못하는 임시적인 기간에는 장애자녀 돌봄수당 등의 별도 지원이 필요하고, 양육자의 경력단절을 회복할 취업, 창업 지원 등도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가 필요합니다.
세대 간의 차이 외에도, 장애인과 보호자의 의견 차이가 특이하게 나타났습니다. 서비스 이용 시 보호자가 장애자녀의 의견을 얼마만큼 반영했느냐는 질문으로 ‘당사자에게 설명은 하되 주 돌봄자가 주로 결정했다.’라는 보기에 보호자는 46%, 당사자는 23%가 체크했습니다. ‘당사자에게 알리지도 않고 보호자 혼자 결정했다.’라는 보기에는 보호자가 35%, 당사자는 13%를 체크했습니다. 즉, 자녀(장애인)는 부모가 나에게 내용을 알렸는지 안 알렸는지조차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다.’라는 보기에 보호자는 12%, 당사자는 48%를 체크했습니다. 즉,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모든 선택권을 허용해주고,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온 줄로 믿고 속은 것이지요. 부모가 발달장애자녀에게 모든 선택권을 허용하지 않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이는 가정에서부터 발달장애인의 인권이 제한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장애인과 보호자 간의 정보에 대한 인지 정도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인후견 제도에 대해 아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보호자는 25%, 당사자는 43%였습니다. 부모들이 복지정보에 대해 아는 것보다, 장애자녀가 학교나 복지기관에서 받은 교육과 정보의 내용이 더 많은 것입니다. 성인권이나 직업과 고용에 대한 인식도 부모보다 장애자녀가 아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발달장애인 삶의 변화에 대해 부모는 일자리가 줄고, 삶의 편의성도 어렵고, 사회 참여 기회도 줄어들 것이라고 보았는데, 장애 당사자들은 오히려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부모들은 AI나 디지털 문화가 낯설지만, 장애자녀들은 비장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으로 기존의 전화보다 더 편리하게 친구들과 SNS로 소통하는 횟수가 늘고 있습니다. 구두언어적 소통이 어려운 발달장애인들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소통이 더 원활한 경우도 있습니다.
3. 정확한 조사와 구체적인 지원으로
이렇게 당사자와 보호자, 가족 간에도 경험과 정보의 차이로 갈등이 야기됩니다. 하물며 바깥 사회에서 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에 대한 인식의 갭은 훨씬 더 클 것입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만큼 지원하려면, 이와 같이 당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장애인가족의 필요가 무엇인지 전체적인 통계와 함께 각 가정마다의 차이를 먼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역사회기반(CBR)의 사람중심계획(PCP)으로 구체적인 질문을 하고, 의사소통 조력을 통해 정확한 대답을 얻어, 현장의 필요대로 서비스를 개발하고 사각지대까지 아니, 소리 없이 그림자로 묻혀있는 사각지대부터 일일이 찾아가서 전달하고 발굴해야 합니다. 그러면 발달장애인가족은 더 이상 죽지 않고,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