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조기교실 다니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유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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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4 19:45




글 : 정유진 (부모 / 유아특수교육 석사 / 국제행동분석가)


17년전쯤 말이 터지지 않고 늦되던 두 살백이 아들을 데리고 처음 소아정신과를 찾았습니다. 수술로는 낫지 않는 병이니 병원 다니느라 돈 쓰지 말고 맛있는 거나 사주라던 의사의 모진 소견을 듣고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던 절망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기저귀라도 떼야 받아줄 거라던 발달센터에 무작정 대기를 걸어놓고 기다리기를 몇 개월... 그렇게 재현이의 치료, 특수교육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만3세부터 5세까지 2년가량 조기교실에 다녔습니다. 비슷하면서도 참 많이 다른 또래아이들 8명을 선생님 2명이 소그룹으로 지도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장애등록을 고민하며 많이 울었고 더 어린 동생을 챙기지 못해 죄스러웠고 같은 고민을 해주지 않는 것 같은 가족을 미워했고 내 아이보다 나아보이는 아이들을 질투했고 내 아이보다 못해보이는 아이들을 보며 얄궂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뒤지고 다녔지만 오히려 머리와 마음은 더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의 저와 너무나도 닮은 부모님들을, 이제는 선배엄마와 선생님의 이름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자녀의 장애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아이만의 개성과 삶으로 품어안는 쉽지 않은 여행이 시작된 첫 2년의 잘못한 일을 반성해보려고 합니다. 


그 당시 재현이는 다행히 조기교실을 너무나 즐거워했고 수업이 끝난 뒤 다음 치료장소를 향해 차로 이동하는 시간 역시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동차 탑승과 하차였습니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앞까지는 신나게 잘 오는데 차에 태우려고만 하면 바닥을 구르며 거부했습니다. 짐짝처럼 들고 억지로 태우면 바로 방실방실 웃으며 말짱해졌지요. 차에서 내리는 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납치라도 당하는 것처럼 차에서 내리는 순간 애를 먹이다가도 일단 강제로 일으켜 세우면 치료실을 향해 신나게 뛰어갔습니다. 


아이가 말을 해주질 못하니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 길이 없는 ‘세살 재현이의 미스테리’였습니다. 매일 두어 개의 치료를 다니는 일정동안 매번 이 전쟁을 치러야하니 재현이와 저에게는 참으로 힘든 관문이었습니다. 그 때의 재현이 엄마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부모님들이 저에게 이런 행동의 원인과 대처법을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인을 밝히는 상담을 하기에 앞서 긴 호흡과 멀리 보는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드리는 일을 제일 먼저 해드리고 싶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떼 부리고 원인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하더라도 “왜 이유도 없이 울까? 왜 어제까지는 좋아했던 걸 오늘은 갑자기 싫어할까?”를 묻기 이전에 “모든 것은 다 벌어질 수 있고 이미 벌어지고 있는 거야.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나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야.” 라고 생각해보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습니다.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작업은, 그걸 담아낼 마음의 공간이 생길 때 담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 스스로에게 에너지나 여유가 없는데 전문가의 분석을 속부대끼도록 일방적으로 받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때의 재현이 엄마 역시 바쁜 스케줄만 머릿속에 가득한 엄마였던 것 같습니다. 자신만의 템포를 존중받길 온몸으로 말하며 바닥을 구르는 재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음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급하게 짐짝실 듯 아이를 차에 태우고 다녔더랬지요. 차에 앉아있는 시간, 도착한 치료실은 좋았을테지만 차에 오르고 내리는 순간은 재현이에게도 고역이었을 겁니다. 아이에게나 엄마인 저 자신에게나 참으로 가혹하게 굴었던 잘못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치료실을 전전하는 동안만큼 아이가 걷거나 움직일 시간을 빼앗겨버린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겸사겸사 센터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재현이와 유유자적 걷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운동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논문이나 증거를 굳이 들이대지 않더라도 몇 개의 집중적인 치료와 맞바꾼 이 ‘삶의 여유’는 정말로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좀더 정확히는,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 노래만 틀어주고는 그저 시간에 맞게 도착하도록 운전만 해왔던 엄마기사의 역할에서 벗어나 ‘주변을 휘저으며’ 산책하기 시작한 아이를 좀 더 신경써서 살피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시작, 아니 재현이의 변화를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의자에 앉거나 걸을 때의 자세가 좋아지고 주변을 둘러보고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상황에 놀라기도 하고 엄마 뒤에 숨기도 하고 엄마와 떨어져 멀리 앞서가기도 하고 엄마도 와보라며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가라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후배 부모님들께 말씀드리곤 하는데, 말 그대로 차를 세워두고 밖으로 나가 땅을 밟고 걸으며 아이가 세상과 어떻게 대화하는지 살펴보는 경험은 엄마인 저에게도, 재현이에게도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독특해도 괜찮아]를 저술한 배리 프리전트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회복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다 보면 아이들이 커 가면서 보여 주는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놓치기 쉽다. 운전자가 목적지에만 너무 집중하느라 가는 길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는 것과 같다. 반면에 나는 아이들이 거둔 사소한 성과와 작은 발전에 큰 기쁨을 얻는 부모들을 많이 봤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긴 여정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335페이지)


재현이와 비슷한 아이를 키우고 저와 비슷한 잘못을 여전히 걷고 있을 부모님, 잘못이나 실수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잘못임을 알고 있어도 역주행하기에는 두려운 부모님들께 드리고 싶은 글입니다.      



* 이 글은 <함께 웃는 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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