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82년생 김지영과 82년생 장애맘

김성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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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9 12:34




글쓴이: 김석주(자폐청년의 부모/ 음악치료사/ 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교육위원)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러하겠지만, 특히나 장애자녀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직면하기가 쉽지 않다. 결혼 전 꿈꾸던 미래는 커녕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역할을 덜컥 맡아, 고치지 못할 고장난 시계에 평생 갇힌 듯한 절망을 익숙해질 때까지 꾸역꾸역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꿈꾸었는가?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었는가?

나의 재능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아내, 어떤 엄마, 어떤 여성이고 싶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애써 접어두고 외면하며 그저 세월을 견디려 한다.


그래서인지 ‘82년생 김지영’은 책으로 이미 유명했지만, 읽기엔 늘 망설여졌었다. 현실도 감당하기 벅찬데, 책에서까지 현실의 심각함을 직접 대면하고 싶지 않은 회피심리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긴장 속 약간의 빈틈이 생기던 날 영화로 만나게 되었다. 


뭇관람객들의 평에 의하면 원작보다 덜 아프고 더 행복한 결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아니 실제 이웃들보다 더 선량하고 배려심 깊은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오히려 판단이나 비판의 경계를 풀어놓고 아무런 방어 없이 울컥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 특정한 어떤 사람들만의 잘못이 아니로구나. 거대한 관습과 문화 속에 갇혀 모두가 알지도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저지르게 되는 굴레로구나.’


“니가 짧은 치마를 입으니까 남자가 따라온 거지. 피하지 못하는 건 니 잘못이야.”

“취직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시집이나 가라.”

“니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애 맡기고 직장 다니려는 거니?”

“여자가 성공하면 뭐해. 엄마 없이 큰 자식들 나중에 다 문제 생겨.”


우리의 일상 속에 너무나 흔하디 흔한 말들이기에, 한 마디씩만 떼놓고 보면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런 말들마다 일일이 예민하게 반응하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라고 넘겨버리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크게 표시나지 않는 스크레치를 가족과 동료와 이웃들에게서 매일 수시로 당하게 된다면 어떨까? 


사람이 쓰러지는 건, 한방의 어퍼컷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스크레치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모양으로 찔러올지 모르는 날카로운 가시들로 매일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면 견딜 수 있을까? 오히려 단번에 부러지거나 멍드는 상처들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치료라도 받을 수 있지만, 이렇게 수시로 일어나는 스크레치들은 원인도 깊이도 알지 못하고 스스로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며 서서히 병들게 된다. 감내하고 삭히고 넘어가던 82년생 김지영은 내적인 분열로 그 증상을 드러내었고, 영화 말미, 참지 않고 당당히 자신을 표현하는 연습으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내가 최근 만난 82년생 장애엄마들은 이런 말을 했다.

“장애자녀에게 온전히 희생하는 선배 어머니들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끝없는 치료와 양육에만 매달리기보다는 내 시간, 나의 일도 병행하고 싶어요.”

“예술가로, 운동선수로 키워낸 장애자녀의 성공기가 마구 좋아보이진 않아요.”


그들에게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다. 이런 표현이 건강한 것이다. 

“평생을 장애자녀의 매니저로 뒷바라지 하는 분들 중엔, 그것을 희생이 아닌 새로운 직업이자 소명으로 선택하신 분들도 있어요. 그 길을 즐기면서 간다면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자식의 위해 차선의 길을 선택하기보다, 본래의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최선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시길,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시길 바래요.”


육아를 분담할 가족의 인식, 그리고 장애자녀 돌봄의 복지지원이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면 당연히 장애엄마도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자기다운 정체성을 찾고, 일이나 여가를 병행하며 가정과 사회 속 다양한 역할들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나갈 수있다. 그러면 장애자녀만 바라보다 초점이 흐려지지도 않을 것이고, 노력해도 크게 변화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한 시간들을 억울해하지도 않을 것이며, 남은 가족들의 소외나 무관심도 줄어들 것이다.


‘장애’라는 명명은 평생의 불편함, 발달의 어려움을 내포한다. 그것은 당사자의 부족함을 채워서 바꿔야 한다거나, 틀린 상태이니 고쳐서 맞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독특성을 가진 존재 그대로 인정하고, 어렵고 불편한 상황을 가족과 이웃, 사회적 환경으로 지원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지원은 가족 안의 역할 분담부터 시작된다. 가사 뿐 아니라, 양육의 분담이 중요하다. 주말에 가족이 함께 공원에 놀러가는 시간도 아름답지만, 그보단 남편이 장애자녀를 데리고 나가 온전히 아내만의 쉬는 시간, 분리의 경험을 자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제서야 자녀의 돌발행동을 예측해서 방어하고, 자연스럽게 후속상황을 이어가는 양육의 기술, 즉 아내의 보이지 않는 케어의 손길 없이 온전히 아빠 혼자서 자녀의 행동을 경험하고 대응에 실패하며 배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많은 시간이 쌓여야 가족 모두가 각 역량대로 장애자녀의 온전한 지원군이 된다.


실제로 젊은 부부들 중엔 남편이 육아휴직을 맡고 아내가 직장을 다니며 역할을 나누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에선 남편이 회사에서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인식을 충분히 가졌더라도 실제 효과적인 분담이 이뤄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친가나 시가쪽 부모님들이 손자를 맡아서 키우기도 하는데, 이때는 양육방식의 다름이나 관계의 불편함, 경제적 부담 등 또 다른 어려움까지 감수하며 동행해야 한다.


사회복지제도로서 활동지원인 서비스를 활용함도 바람직하다. 최중도의 도전적행동을 가진 발달장애아동을 부탁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겠지만, 활동지원인 또한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을 두고 아동을 파악하고 적응해나가며 돌봄의 기술이 발전하는 것이므로, 이 또한 지원의 범위를 넓히는 긍정적 대안으로서 긴 시간 소통하며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당장 자녀와 엄마의 시간을 분리할 수 없는 현실에서, 부모회 활동이든 직업적인 역할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사회 정책적인 인식과 제도의 확산을 위해 계속 소리내어 나 외의 김지영, 최정희, 박혜경,...들도 모두 당당한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거대한 편견과 억압의 굴레를 함께 풀어내길 바란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얽히고 설킨 콤플렉스를 벗어나 “쉬고 싶다”, “일하고 싶다”, “배우고 싶다”, “놀고 싶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행동하며, 동등한 분담과 공존, 배려와 존중이 사회 속에서 자연스러워지는 그날까지 82년생 장애맘들의 도전을 열렬히 응원한다.


* 이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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