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지원
글쓴이 : 김석주 (자폐청년의 부모/음악치료사/발달장애지원전문가포럼 교육위원)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대에 발달장애 가족의 동반자살 사건이 증가하였다. 부모보다 덩치가 더 커진 자녀의 충동적이고 난해한 행동들을 종일 감당하다가 체력도 마음도 소진되는 극단의 상황들이 눈에 선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괜찮아질 거라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야만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데, 미래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지탱할 힘을 낼 수가 없게 된다.
발달장애인의 미래는 무엇일까?
부모가 없어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요즘 매일 하루 한 두통씩 내게 전화를 하는 지적장애 성인이 있다. 10년 전 장애인거주시설에 치료사로 일하러 갔을 때 내게 수업을 받았던 분이다. 발라드 가요를 좋아하고, 카세트테이프 리어카 장사를 하는 게 꿈이셨다. 몇 년 전부터 탈시설정책으로 지역사회에 주거지를 마련하고 자립지원서비스를 받아 따로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럭저럭 잘 적응하고 계신다. 낮에는 보호작업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 일상을 유지하고, 성인후견인의 도움으로 금전을 관리하며 주말에는 연인과 데이트하는 사진을 내게 보내오기도 하신다. 다만 작년부터 코로나로 인해 외부활동이 줄어들어 심심함을 견디려 전화가 더 잦아졌을 뿐이다.
의사소통이나 신변처리에 어려움이 있는 최중도 장애인들은 아직도 거주시설에 남아 자립훈련을 지속하고 있다. 시설의 여건 상 일인 일실까지 공간 확보가 어려워 빌라 형태의 건물에 각 호마다 몇 명이 함께 거주하며, 서로 간 마찰을 줄이도록 개인의 기질이나 행동 특성들을 고려해서 룸메이트를 조정해주곤 한다. 비슷한 또래끼리 함께 살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고, 형과 동생, 혹은 아버지와 아들 같은 연령이 함께 살며 만족하는 경우도 있다.
중년의 성인장애인들끼리만 같이 지내다가, 어린 아동과 한 집에서 지내게 됐을 때 의외의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2,30대 남성장애인들은 여느 비장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힘자랑을 하고 예쁜 여인에게 호감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보이지만, 40대를 넘어가면 기세도 누그러지고, 쑥스러움도 많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평소에 표정이나 움직임의 변화가 거의 없이 목석처럼 늘 같은 자리에 서계시기만 하던 40대 후반의 성인이 어린 아동과 한 집에 살면서 웃음소리가 늘었다. 현관에 어린 아동이 들어서자마자 맨발로 반기며 얼굴에 환한 미소와 감탄의 소리를 내는 모습을 나도 처음 보았다. 언어 발화가 전혀 되지 않던 분이셨기에 그분의 음성을 그날 처음 들었다.
4~50년 전 일반 고아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장애아동들을 복지시설에서 보호할 때 당시는 그것이 최선의 공생이고 또 봉사였을 것이다. 경제적 성장과 경쟁적 발전을 우선하던 지역사회에서 장애인들은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길에서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다양성, 평등, 인권이 강조되고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글쎄다. 내가 장애인의 가족이기에 느끼는 인식일 뿐, 비장애인들에겐 아직도 먼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양적, 물리적인 변화보다 더 느리고 어려운 게 인식의 변화이며, 대개 한 세대를 지나서야 새로운 가치관이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 같다.
2019년 유엔 아동권리협약 30주년을 맞아 아동의 대안적 양육 가이드라인으로 아동의 권리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는데, 그 내용 중 고아원 등을 탈시설하여 원가정이나 위탁가정을 지원하도록 강조한 것이 있다.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 모두에게 탈시설은 권리이며, 안정적 애착과 자기결정권이 가능한 가정의 형태를 지원하는 정책은 시대적인 사명이 되었다.
아동과 장애인, 우리 모두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시장과 미장원과 목욕탕, 익숙한 길을 산책하며 원하는 이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어릴 때는 부모와 같은 보호자가 필요하고, 청소년이 되면 친구가 필요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연인이나 동료가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이 들어서는 자녀나 손자까지 돌보고 싶어할 수 있다. 일인 일실의 공간과 일대일의 지원인만 매칭된다면, 결혼도 육아도, 아름다운 황혼도 모두 가능하다.
스웨덴이나 뉴질랜드에는 장애인 거주시설이 전혀 없다. 주거급여와 자립지원인력을 개개인별로 지급하여 어디에서 누구와 살든 이사와 동거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지원한다. 모든 장애인에게 양적인 예산 충족을 넘어 개개인별 의사소통에 기반한 권리 지원 서비스를 다양화하고 있다. 장애인의 삶을 부모에게 맡기지 않음으로, 장애자녀는 더 이상 부모의 소유도 아니며, 짐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미래가 불가능할까? OECD국가 중 한국의 GDP순위는 스웨덴이나 뉴질랜드보다 더 높다. 결코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복지인식의 부족으로 인한 정책과 제도의 부실함일 뿐이다. 그리고 부모 자신 외에 타인을 믿지 못하는 마음도 절망의 한 원인일까? 이미 영아기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내고, 학교와 복지관의 교사들을 믿고 맡기지 않는가. 그 정도 사회적 신뢰면 충분하다. 양적인 예산과 지원 시스템만 확대되면 부모가 없어도 발달장애인 모두 말 한마디 하지 못해도, 신변처리 못해도, 도전적행동이 여전히 남아있어도 전문인력의 지원을 받으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단, 내 자식만 내가 지킨다는 각자도생의 두려움을 버리고, 당사자와 부모운동으로 힘을 전환해야만 미래를 앞당길 수 있다. 미래는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버티고 계시는 부모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 부디 힘내시라. 함께 함으로 모든 게 곧 괜찮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