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의 날적이
<장애아이들에게도 무대가 필요하다>
글 김언정(자폐성장애청년 강민준 엄마)
2013년 민준이가 초등 5학년이었을 때, 우리는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 다니고 있던 교회는 민준이가 5살 때부터 다녔던 곳이었는데 성도 수가 아주 많은 교회였다. 큰 교회여서 누리는 장점도 있었지만 장애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가 커갈수록 대형 교회의 한계가 많이 느껴졌다. 교회를 옮기기로 결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준이와 오랫동안 함께 잘 다닐 수 있는 교회를 찾고 싶어서 우리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2012년 12월까지 다니던 교회에서 하던 모임과 봉사, 활동 등을 모두 마무리 지었고, 2013년 1월 첫째 주부터는 여러 교회를 탐방하며 다녔다. 예전 교회에서의 경험으로 볼 때 이전과 같은 대규모의 교회보다는 소박하고 작은 교회가 우리 가족과 잘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곳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찾았다. 그러다 아이들 예배가 따로 없이 초등 이후의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정보만 가지고 한 교회를 방문했는데 여러모로 마음에 들어 정착하게 되었고, 그 교회가 현재까지 9년째 다니고 있는 '주님의 은혜교회(수원)'다.
예전에 우리가 다녔던 대형교회에서는 한 학년 아이들이 대체로 500명이 넘는 상황이어서 워십팀도 찬양팀도 모두 오디션을 통해 선발(팀당 40명 정도)했고, 이 아이들만 열심히 연습시켜 매주 예배 시간에 세웠다. 성탄절에도 모두의 축제라기보다는 워십팀, 찬양팀만 축제 분위기였고 나머지 아이들은 멋진 공연을 구경만 하다 집에 가곤 했는데,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했던 나는 매년 이 부분이 참 아쉬웠다.
우리가 새롭게 합류하게 된 교회는 20가정, 100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작은 규모였다. 교회를 옮긴 첫 해, 작은 교회에서 경험해 본 성탄축제는 '모두'의 축제였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누구나 무대에 설 수 있었고, 온 가족이 함께 준비한 공연을 보여주는 등 이제껏 내가 봐온 성탄절 축제하고는 참 많이 달랐다.
두 번째 해인 2014년, 성탄절이 다가오자 예년처럼 성탄축제를 예고하며 발표나 공연을 할 사람은 신청하라는 공지가 있었다. 나는 민준이의 노래를 신청하고 싶었다. 그때까지 민준이가 무대에 설 기회가 없어 무대 매너를 배우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장기인 노래를 보여줄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로 걱정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이렇게 아담한 규모의 교회 무대라면 실수해도 괜찮고, 망쳐도 괜찮으니 용기를 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민준이 혼자 세우기는 불안하기도 하고, 반주자도 필요하니 남편을 설득해서 함께 세워야만 했다. 그런데 남편은 옛날부터 앞에 나서기를 너무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말을 꺼냈을 때 남편의 반응은 아주 아주 나빴다.
"뭐? 민준이하고 앞에 나가서 노래하라고? 안 해! 안 할 거야!!"
"아유, 그러지 말고 한번 해봐요. 집에서 하던 것처럼 기타 치고 민준이더러 노래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싫어. 민준이가 막상 무대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잖아.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당신이 민준이하고 같이 해"
내가 무대에 설 수만 있었다면 남편에게 제안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음정이 잘 안 맞는 음치 직전의 노래 실력이며 다룰 수 있는 악기도 하나도 없었다. 평소 남편은 나의 노래를 들으면 매번 비웃곤 했었다.
"맨날 음정 안 맞다고 나를 구박하면서 그런 소리를 해요?"
나는 포기하지 않고 며칠에 걸쳐 계속 작업을 했다.
"민준이가 그나마 잘하는 게 노래밖에 없는데 무대에 설 기회는 거의 없잖아요. 그러니 이런 기회를 잘 살려 무대를 경험하게 해 주면 여기에서 배우기도 하고, 성장하지 않겠어요?"
남편은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무대에 섰다. 민준이 나이 14살, 사춘기가 한참인 시기인 데다가 '엄마'를 너무 많이 불러서 엄마인 나조차 노이로제 직전까지 가게 했던 시절이었다. 민준이는 무대에 나가서 전주나 간주가 흘러나오는 상황에서도 객석에 있는 나를 가리키며 연신 "엄마"를 불러댔다. 나는 정말 얼굴이 화끈거렸고, 괜히 노래하라고 시켰나 순간적으로 후회도 되었다. 그러나 민준이는 '엄마'를 계속 부르다가도 노래를 해야 할 순간이 되면 기가 막히게 첫 음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첫 무대치고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음 해에도 나는 남편을 또 설득해서 성탄절 무대에 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 해에 민준이는 2층에 있던 유아방에서 아예 나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순서 직전에 어찌어찌 본당에 오기는 했는데 무대에 올라가서는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다. 애써 준비한 무대가 망쳐진 느낌이라 참 당황스러웠고, 축제 분위기였던 성탄절에 나는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뿐만 아니라 교회 식구들의 눈치도 살피게 되었다. 나는 괜찮다고 마음먹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다들 어떤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주님의 은혜교회에 다닌 지 4년이 되던 해, 나는 성탄절 공연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해 성탄절 축제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우리 부부와 딱 마주친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올해는 왜 민준이 노래 발표 신청을 안 했어요? 민준이 노래가 없으니 너무 서운했어요. 앞으로 민준이네는 매년 꼭 무대에 서도록 하세요."
아이고야... 우리 부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목사님의 요청에 많이 당황했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로 목사님과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나는 남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래도 목사님 말씀이니 순종해야겠죠?"
막상 무대를 준비해보니 선곡도 어렵고, 민준이를 연습시키기도 어려워서 '여기서 이제 그만~~' 하고 생각했던 남편과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돌려먹게 되었다. 결국 다음 해부터는 성탄절 공연을 위해 3월부터 선곡을 하고 일 년 내내 그 노래를 많이 듣고 자주 부르며 12월 무대를 준비시켰다.
이 글을 쓰면서 옛날 동영상들을 다시 찾아보니 여전히 내 눈에 안 차는 민준이의 여러 가지 부족함들이 보였다. 무대에 올라가서 다리 삐딱하게 서 있기, 마이크 앞에서 노래하지 않고 멀리서 부르기, 어떤 때는 입에 넣을 듯 마이크를 딱 붙이고 부르기, 노래하면서 마이크에 붙은 스티커 떼기, 노래 끝나고 아빠는 기타로 후주를 하는 동안 무대에서 먼저 뛰어 내려오기 등등. 2019년까지도 민준이의 그런 모습들은 사실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5년쯤 계속 무대에 오르자 아이에게서 보이는 확연한 변화도 있었다. 차례를 알려주고 바로 앞사람이 할 때쯤 무대 근처에 가서 앉아 있자고 하면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조금씩 무대에 서는 것이 익숙해지고 즐기는 것 같은 모습도 보였다.
진짜 놀라운 건 관람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성탄절 공연 자체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민준이는 매년 그 시간에 겉돌았었다. 무대가 있는 본당에 오지도 않고 혼자 유아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본당에 가자고 해서 앉혀놓으면 다른 사람들의 무대에 집중하지 않고 계속 웃거나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다 보니 혹여라도 민준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나는 아이를 감시하느라 바빴고, 성탄절 공연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그랬던 민준이가 언제부턴가 자리에 착석해서 있는 듯 없는 듯 전체 공연이 끝날 때까지 평균 2시간 이상을 앉아있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몇 년 더 지나자 내가 민준이 옆에 꼭 붙어있지 않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발전이었다.
이렇듯 작은 무대에서 여러 번 부담 없이 연습하며 무대매너와 자신감을 쌓아왔기에 이후에 민준이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아닌 낯선 사람들 앞에서도, 1500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큰 무대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무수히 반복하며 다듬어지고, 실수하는 가운데에서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나는 민준이를 통해 배웠다. 교회의 성탄절 무대 두 번을 끝으로 '무대는 영원히 안녕'했더라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오늘의 민준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민준이네 가족밴드(민준이네 가족밴드에 대한 내용은 다음글에 이어집니다^^)의 아름다운 모습도 나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의 실수가 나의 체면을 구기는 것으로 연결될 거 같아 민준이에게 주어야 할 기회를 박탈하고자 했던 나 자신의 편협함을 이제는 돌아보며 깊이 반성한다.
그리고 한껏 좁아져 있던 우리 부부의 마음을 돌리게 해 주신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틀려도, 실수해도 괜찮다고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매년 꼭 무대에 서라'는 요청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로를 받았고 또 격려가 되었다. 또한 그렇게 여러 해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내 마음도 조금씩 단단해졌다. 민준이의 반듯하고 의젓한 모습만을 보이고 싶어서 아이의 실수를 마음 졸이며 지켜봤던 처음 몇 해와 달리 이제는 나도 완벽한 민준이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민준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대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장애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놓을 수 있는 부담 없는 무대들이 많아지고, 또 지속적으로 제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곳이 학교이든, 교회이든, 장애인 전용 예술관이든 지속적인 경험과 시도들을 통해 장애아이들도 자라고 성장해 나갈 것이다. 부모도 교사도 이웃들도 이를 함께 믿고 아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려는 마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